‘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십대 후반이었을까 아니면 이십대 초반이었을까. 아무튼 철들고 주위를 둘러보고 난 뒤, 긴 한숨 끝에 셈해본 내 미래는 그다지 가망이 없었고 지금 유행하는 ‘이생망’의 선언을 비수처럼 품고 주저앉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건 아마도 딱히 부와 권력으로부터의 소외의식이라기보다는 ‘인생은 고해이다’라는 수준의 탈유년의 감각이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이생망’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특별히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이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묘비명을 둘러쓰고 죽은 척해도 또 다른 태양은 뜨고 사람들은 분주하고 세상은 무표정하다. ‘너는 망해라’라고 비웃듯 세상은 더 윤기 나고 타인들은 더 분주히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 아닌가. 더 큰 절망과..
한때는 나도 자기계발서의 독자였다. 뭐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던 시기였다. 형편이 좋지 않았고 미래에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희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자기계발서를 찾았다. 그 안에 어떤 해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성공은 습관이다’ ‘소원을 생생하게 그려라. 글로 써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읽을 때는 고통이 잠시 멈추고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도로 힘이 쭉 빠졌다. 꿈을 꾸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뉴욕대학교의 심리학자 가브리엘 외팅겐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에서 긍정적 공상의 문제점을 다각..
우아함이라곤 없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 말이다. 특히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앉혔던 1차 청문회는 가관이었다. 신념이나 명예를 지키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들. 증인으로 출석한 자들은 ‘불법’보다는 기꺼이 ‘무능’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비록 사회적 선(善)이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믿음이나 철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에게는 고상함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드라마 의 ‘정기준(윤제문 분)’을 떠올려보라. 그에게는 ‘악당의 기품’이 있었다. 하지만 증인석에 앉은 자들 중에 그 정도의 품위를 지키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나는 모르오, 나는 무능하오, 나는 꼭두각시였소”를 읊조렸을 뿐이다. 나는 이 처절한 무능의 스펙터클 ..
연말이 되면 으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낸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진다. 내년에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한다.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들’이나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것들’과 같은 리스트가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초등학생 둘을 만났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책가방이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시험 망쳤어.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
한 유명한 책의 서문을 빌려 지금의 대한민국을 나는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세월호라는 유령이.’ 지금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을 흔들고, 광장을 사람들로 메우고, 촛불과 횃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전에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라는 정식명칭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거듭 ‘세월호 7시간’을 추궁하고 있다. 매스컴도 연일 최순실 국정농단과 함께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에 대한 해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참사로부터 2년 반이 지난 현재, 왜 세월호는 자꾸 돌아오는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대학 입학시험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들고 학생부종합전형이 강화되면서 정시보다 수시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진로 탐색이 활성화되고 체험 학습과 교실 수업에 대한 참여도가 높아지는 등 교과, 비교과 활동 모두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찌감치 진로를 설정하여 자신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중학교 때부터 진로를 준비해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리 설정된 진로에 따라 자신의 활동 전반을 대학 전공과 미래 직업에 부합하도록 맞추어 가야 ‘일관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고등학교 선택이 선행되어야 하..
정치인들이 정치를 ‘대중문화’로 만들어버린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것에 제일 능했던 이는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배우 출신의 레이건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웅담을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이 실제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설, 협상,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도 할리우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1965)을 시청하느라 정상회담용 자료를 검토하지 못했던 일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할 테면 해봐. 오늘은 나의 날이야”라는 대사에 감동을 받아 의회의 조세 인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미국의 위대함’을 설파하기 위해 인용하곤 했던 일화는 (1944)의 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자신이 연기했던 ..
어릴 때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어른들이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잘되어 가냐?”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찔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안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탕하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잘되고 있지 않으면 걱정과 간섭이 주렁주렁 달릴 게 빤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만은 예외였다. 떡이나 빵, 과일을 건네주며 외할머니는 나직나직이 말씀하셨다. “할 만해?” 이 말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기 힘든데도, 힘에 부치는데도 갑자기 할 만해지는 것 같았다.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나 자신이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길을 걷다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할 만해?” 선뜻 답하기 힘들었다. ‘만하다’라는 보조형용사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