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음모론이 있었다. 최근 곰탕 암호설에서부터 세월호 인신공양설, 천안함, 국정원 댓글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소외에 기생하는 음모론의 생산이 현대사회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음모론은 2008년 이전에는 한국사회에서 접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의 저자 전상진에 의하면, 음모론은 일종의 신정론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신정론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문화적 노력이고 음모론은 종교가 퇴색한 이 시대에 그 기능을 대체하는 일종의 세속적 신정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지 ..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오바마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서 이 글에 대해 “적어도 나는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트럼프에게 일침을 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작다는 점을 비꼰 동시에,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트럼프가 박 대통령에게 저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오바마처럼 응수할 수 있을까.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미래의 역사교과서에..
“두 명 이상이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강간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1971년 미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쓴 속 문장이다. 여기서 ‘강간’이란 여러 성폭력을 아우르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성폭력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집단적인 움직임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16년 10월 대한민국에서, 이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SNS에서는 용광로처럼 부글거리는 열기와 에너지로 “#00_내_성폭력” 운동이 펼쳐지는 중이다. 웹툰계와 문단에서 일어난 성폭력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이제 영화계, 미술계, 교육계 등을 넘어 군대 내 성폭력도 논의되어야 한다..
직장을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에 만난 사람들은 더없이 부러워하면서도 마지막에 이 질문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엔 뭐 할 건데?”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해보려고요. 일단 올해는 좀 쉬고요.” 당차게 대답을 하면 질문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시니컬하게 대응하거나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라며 너스레를 떨고 싶지는 않았다. 나라고 왜 다음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아니, 당사자인 나야말로 ‘다음’에 대해 가장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사람들은 늘 타인의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땐 폭력이 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얘기했다. 왜 좋은 직장을 때려치웠느냐, 요..
최근 김영란법 시행 이후 곳곳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줘도 되는가, 공무원직의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줘도 되는가 등등. 전북도의 신고센터만 해도 하루에 40~50건의 관련 문의가 쇄도한다고 하니, 과연 우리 일상과 삶의 풍속은 한동안 이 법을 놓고 시끄러울 듯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김영란법의 제정과 시행에 대해 찬성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부정청탁과 금품수수에 의한 부패와 불공정이 만연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시시콜콜한 시행규칙과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 ‘신경질’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떤 비애를 느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규제와 절차에 대한 맹목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면적 관료주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란 쉽게 ..
육아서는 대개 어린 자녀를 둔 엄마를 대상으로 한다. 부모가 같이 읽는 경우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육아서는 대체로 엄마의 마음을 겨냥한다. 책 제목에도 ‘엄마’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 , 심지어는 는 제목의 책까지 있다. 아이는 부모가 같이 키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흔히 아이와 엄마 사이의 애착이 불안정해서 그렇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여전히 아이에게 세심하게 공감하며 정서를 보듬는 일은 주로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바, 여자가 남자보다 생물학적으로 공감 능력이 우수하다는 증거는 없다. 공감 정확도에 관한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공감을 평가하고 있다는 상황적 단서를 줬을 경우에만 여자가 남자보다 공감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
백남기 농민이 영면하셨다. 그는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가 캡사이신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경고방송이나 예비 분사도 없이, 규정을 훨씬 웃도는 10기압 이상의 물대포가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러나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와 같은 무대응은 이 정권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물론 기민하게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적절한 수사는 진척되지 않되, 은폐 움직임은 기가 막히게 빠르다. 백남기 농민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찰 3개 중대 250여 명이 병원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에서는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백남기 대책위 측에서는 ‘부검 시도’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부검은 ‘명명백백한 진실=..
“명절 때 어디 가?” “고향 가야죠.” 회사 휴게실에 모여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추석 얘기가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절에 대한 부담과 걱정이 쏟아져 나왔다. 교통체증 때문에 받을 스트레스는 소소한 근심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혼부터 노부모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부담과 걱정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연휴라는 말은 설레지만 명절이라는 말은 무섭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회사라는 공간의 특성상,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다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다가올 명절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한가위인데,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행복해야 마땅한데 마음이 겨울을 향해 벌써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저는 이번에 여행 가려고요, 태국으로.” 그의 말 덕분에 싸늘한 분위기에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