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태아 낙태 붐 세대’의 남녀성비 불균형과 남성들의 불안이 화제다. 초음파 검진이 본격화된 1980년대 후반 이후 10년간, ‘여성으로 감별된 태아’에 대한 인공임신중절 시술은 연평균 3만건에 달했다. 흥미롭다.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제거의 원인이 되는 시대를 지나왔는데, 불안한 건 남성이란다. 두 가지 사실을 기술하는 하나의 문장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변별되느냐는 그 사회의 권력구조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살해 위협’이 아니더라도 여성들은 불안하다. 남녀 임금격차와 여성 노동의 성격이 보여주듯이 여성은 경제적으로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정의당 ‘중식이밴드’ 사건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듯이 정치적 시민권 역시 쉽게 부정당한다. 동시에 여성혐오 문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처음 지방에 내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지역의 토속 음식도 맛있고,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따라 차를 모는 것도, 흙길을 걷는 것도 낭만이었다. 지방 생활 1년이 지나자 깨닫기 시작했다. 가장 맛있는 음식점은 서울에 있고 지역특산 최상품은 곧장 서울로 공수되고 있다는 것을. 시골길은 맞은편에서 차가 오기라도 하면 백미러를 접고 간신히 지나가야 하는 위험한 곡예길이자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비포장도로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교통체증이 거의 없는 지방 고속도로에 환호했으나, 차 한 대 없는 컴컴한 텅 빈 고속도로의 질주는 공포로 변했다. 연극, 뮤지컬은커녕 예술영화 한 편 극장에서 볼 수 없고, 마땅한 일자리가 거의 없어 학생들 대부분이 서울로 가지 않으면 거의 알바생으..
질병은 생물학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또한 사회적인 것이다. 생물학적 소인과 개인적 경험, 사회적 구조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질병 발생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매우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진료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갑작스러운 불안이나 우울, 분노 조절 문제로 찾아올 때 그 배경에는 상당 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사회구조적 문제, 특히 불안정한 노동 환경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감정 이면에는, 좋은 일자리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현실과 생존을 위해 분투하며 감내해야 했던 모욕의 순간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다. 대개는 아픈 줄도 모르고 병을 키워가는 과정이 있다. 진료실에서 만나본 청년들의 꿈은 그리 거창..
노동당 하윤정 후보는 “아재정치 out”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과소대표되고 주류 남성이 과대대표되는 정치 현실을 ‘아재정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례대표 의석이 54석에서 47석으로 7석이나 감소하면서 여성, 장애인, 이주민, 청년 등 정치적 소수자들이 대표성을 얻을 수 있는 비율은 더욱 줄었으니, 20대 국회에서도 이런 상황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물론 아재정치는 여성을 통해서도 계속된다.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하면 밉상”이라던 김을동이나 한기총에 찾아가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인권관련법, 이거 저희 다 반대한다”고 말한 박영선, 논문 표절 의혹에 변명이랍시고 ‘지방대 출신 제자’ 운운한 더민주 비례대표 1번 박경미 등을 떠올려보라. 그런 의미에서 아재정치란 한국 사..
4월의 첫날은 만우절이다. 가벼운 거짓말로 서로 속이며 즐거워하는 날이라고 하지만, 섣불리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2년 전, 우리는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들었다. 그것도 국가로부터. “구조하겠습니다”라는 국가의 호언에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로 화답했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거짓말을 또 해버리고 마는 것처럼,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짓말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그 거짓말을 맨 처음 누가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사이 좋게 함구했다. 국가의 실체가 가장 불분명했던 순간이었다.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겠다는 국가의 약속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는 거짓말의 배후에 있었던 그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가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주장만 여..
한동안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바둑대결에 대한 이야기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체력적으로도 지치지 않는’ 바둑기계의 냉철함과 강인함을 인간 패인의 주요한 요인으로 거론하면서, 인간 한계의 중요한 지점인 것처럼 언급하기도 하고, 미래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처럼 선망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알파고와의 대결에 대한 무성한 말들 속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이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전혀 다른 유형이 등장한다. 한 명은 체스 세계챔피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나치에 의해 호텔 감방에 1년 가까이를 연금 당했던 시기에 우연히 ‘챔피언 체스교습서’를 얻어 완벽한 체스 정석을 통째로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지만 경험이 전무한 순수논리의 인간 ‘B박사..
취업에 필요하다는 스펙의 가짓수는 늘어나기만 하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한동안은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을 합쳐 ‘5대 스펙’이라 일컫더니, 요새는 공모전 수상경력, 인턴 경험, 봉사활동을 더해 ‘8대 스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성형수술까지 포함시켜 ‘취업 9종 세트’라 부르기도 한다니 과연 이 목록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이 스펙에 다음 하나를 추가한다면 ‘인성’이 그 이름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태도나 인성이 중요하다는 건 과거에도 수도 없이 이야기되어 왔던 바다. 하지만 이를 굳이 계측하거나 매뉴얼화하려는 움직임은 적었다. 성격은 자신의 타고난 기질의 바탕 위에,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경험한 요소들이 포개진 어떤 것, 일종의 암묵지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동일본 대참사로부터 5년이 흘렀고, 한 달 후면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돌아온다. 우리는 여전히 재난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재난과 그 영향을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재난은 평등하게 닥쳐온다”고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화 는 인류를 집어삼킬 자연재해에 대비해 21세기형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방주에 올라탈 수 있는 자들은 정보를 독점한 권력층과 소수의 엘리트, 그리고 방주 제작에 투자한 ‘세계적 갑부’들이다. 영화는 범작이지만 그 상상력만큼은 예리하다. 기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돈과 힘을 가진 자에게는 비교적 안전한 삶이,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 삶이 따라붙는다. 이는 닥쳐올 위험과 희생을 예측할 수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