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는 동료들과 전주로 짧은 ‘제로 웨이스트’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전주 곳곳의 채식 식당들을 탐험하며 동물성 재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비건 식도락을 즐기다 모악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숙소에 묵었다. 주인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주택을 숙소로 꾸민 공간 곳곳에 다정한 사연들과 따뜻한 아우라가 스며 있었다. 벽에는 가족들의 어릴 적 사진과 막내가 그린 낙서가 남아 있었고, 오래된 원목 가구와 벽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리고 플라스틱 프리 물건들이 여상한 자태로 널려 있었다. 주방에는 미세플라스틱이 나오는 아크릴 수세미 대신 선인장 모와 코코넛 솔로 만든 수세미가, 일회용 키친타월 대신 쓸수록 부드러워지고 흡수가 잘되는 다회용 소창 행주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고체 설거지 비누로 그릇을 씻고, 각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계좌 좀 불러보세요. 제가 지금까지 여기저기 상 받으면서 상금이 좀 있어서요.” 고마워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불러줬으나 입금된 액수는 무거웠다. 기부금 일금 3억원! 단, 조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기부 철회를 하겠다는 것. 그래서 이 글을 쓰려니 조심스럽다. 이름을 대면 아하, 할 만한 영화감독이다. 그가 기부한 곳은 바로 오동진 평론가가 운영을 맡고 있는 ‘들꽃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2014년부터 들꽃영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독립 저예산 영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주류 영화 산업 밖에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영화인들을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품을 선정하여 올해로 9회째 상을 수여해왔다. ..
북극 유빙 위에 오른 틸 와그너 박사는 드릴로 발아래 얼음에 구멍을 내며 설명했다. “이렇게 두툼한 얼음 밑은 어두워서 미세조류가 잘 자라요. 동물성 플랑크톤이 이 미세조류를 먹고, 이 플랑크톤은 물고기와 오징어, 일부 고래의 먹이가 되고, 다시 육식 고래가 이 물고기와 오징어를 먹는 게 북극 먹이사슬이에요.” 와그너 박사는 드릴 끝에 달린 원통을 바닥에 놓고 안에 있는 얼음을 꺼냈다.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이었다. 설명을 듣고 봐서 그런지 얼음이 옅은 갈색빛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박사는 미세조류 양을 측정하기 위해 얼음을 밀봉해 실험실로 보냈다. “미세조류는 얼음 밑 어두운 곳에서만 자라는 음서 생물이에요. 북극 얼음이 사라지면 이 미세조류도 사라지겠죠. 그러면 동물성 플랑크톤도 사라지고, 결국 고래는..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자동차나 냉난방, 산업활동 과정의 화석연료 사용을 대부분 이야기한다. 화석연료가 기후변화의 주요한 원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식생활 문제가 의외로 기후변화의 큰 원인이라는 사실은 시민들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다. 식생활 중 기후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육식이다. 식생활을 통한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66.5%는 육류와 유제품으로 인해 발생된다. 육식을 통해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물질은 메탄가스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가 일으키는 온실효과보다 21배 더 영향을 준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18%는 육식으로 인해 배출된다.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이 내뿜는 가스와 배설물이 그 주요 원인이다.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과 산업활동으..
며칠 전 나는 지하철에서 울고 말았다. 붐비는 전철 안에서 마스크를 추켜올리고 눈물을 흡수시켰다. 6월10일 시행 예정이던 일회용 컵 보증금제가 결국 6개월 유예되었다. 줄초상 치르는 것처럼 서러워한 이유는 실제 일회용품 규제가 줄초상을 치르게 생겨서다. 지난달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 단속이 유예되었다. 6월부터는 컵 보증금제에 이어 매장 내 일회용 빨대와 종이컵 사용 금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일회용 컵에 보증금을 매겨 세상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일회용 컵을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이 버린다. 1년간 국내에서 버려진 플라스틱 컵 84억개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에서 달까지 갈 수 있다. 같은 페트 제품이지만 음료병에는 재활용 분담금이 있는 반면 테이크아웃 컵은 깨끗한 재활용품을 더..
보헤미안 지수(Bohemian Index). 새 정부를 이끌어갈 각료들의 인사가 진행 중이고, 곧 지방선거를 앞둔 와중에 뉴스를 보다보면 이 단어가 종종, 아주 많이 떠오른다. 이 지수는 특정 지역에 예술가들이 얼마나 사는지 나타내는 지표이다. 도시의 창조성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위해 미국 카네기멜런대학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가 20년 전에 직접 고안했다. 2000년 밀레니얼을 기점으로 탈산업사회를 지나 IT 기반의 지식경제가 펼쳐지면서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 연구로 알려졌다. 그 결과는 작가, 디자이너, 가수, 작곡가, 댄서, 배우, 감독, 화가 등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보헤미안 지수가 높은 지역이 하이테크 산업의 발전과 매우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나는 전 세계 도시를 달린다.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이 항구에 머물 때면 운동 삼아 근처 마을을 뛴다. 오전 일과시간을 맞추려 채비를 서두르면 이른 햇살이 비추는 코펜하겐 인어공주 동상이나 관광객의 수다가 잠잠해진 고즈넉한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을 홀로 누릴 수 있다. 그 맛이 좋아 달리기를 오래 즐기고 있다. 스페인 빌바오, 남아공 케이프타운,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인도양 세이셸에서 달렸고, 심지어 떠다니는 커다란 북극 얼음 위를 뛰기도 했다. 뛰다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거리를 달리는데, 작은 오토바이가 뒤에서 앞지르지 않고 따라왔다. 내리막이 나오자 오토바이는 엔진을 끄더니 비탈면 가속을 이용해 뛰는 무리를 천천히 앞질러 갔다. 숨이 가뿐 내게 매연을 뿜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폴리프로필렌,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 메칠메타크릴레이트크로스폴리머…. 도대체 이게 다 뭔 소리냐면, 화장품에 가장 흔히 쓰이던 미세 플라스틱 성분명이다. 2015년 나는 읽기도 힘든 성분 20여개를 나열해놓고 화장품 라벨에서 이 성분들을 골라냈다. 이들이 하수도를 타고 강으로, 바다로 갔다가 먹이사슬을 타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100여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인형 눈알 붙이기’만큼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성분 골라내기 작업에 착수했다. 4000개가 넘는 성분을 하나씩 확인했다. 우리는 미세 플라스틱 의심 제품을 뽑아 해당 기업에 편지를 쓰고 사용 금지를 요구하는 화장품 법 개정 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17년 씻어내는 화장품에 미세 플라스틱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나는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