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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을 앞둔 요즘 여권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과 관련해서 격정적으로 토해낸 ‘배신의 정치’란 울타리에 갇혀 있다.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는 국민의 심판이 필요하다”고 직설적으로 언급하자 여당 의원들은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직에서 축출해 버렸다. 삼권분립이 보장되어 있는 민주국가의 집권당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유신시대로 회귀했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은 내년 총선에 나갈 새누리당 공천 신청자들에게는 헌법과 같은 규범이 될 터인데, 그런 현상이 문제의 대구 동구을에서 처음 나타났다.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에 도전장을 낸 이재만 전 대구 동구청장이 출마선언을 하면서 “배신의 정치를 응징하고 의리를 지키는 일꾼이 되려 한다”고 일갈을 했으니 말이다. 이 전 구청장은 자신은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응징’을 하겠으며, 더 나아가서 ‘의리’를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니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조직원의 ‘피의 맹세’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무리 마피아라고 해도 그런 맹세는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재만씨는 공공연하게 맹세를 했으니 그것도 신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씨 같은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날 방법이 없음을 안다면 이런 현상은 이해가 갈 것이다. 충성서약을 대면으로 할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재만 대구 동구청장_연합뉴스



이재만씨의 공개적 충성서약은 대구는 물론이고 영남권에 낙하산 공천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행동준칙으로 작동할 것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별다른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친박’이란 하회탈을 쓰고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되는 지역구로 낙하하려는 현상이 요즘 우리가 보고 있는 서글픈 모습이다. 하지만 더욱 슬퍼해야 할 것은 이런 현상을 야기한 대구·경북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이다.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무조건 여당을 찍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유승민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공천이 되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새누리당은 아직 공천 규칙을 정하지 않았는데, 김무성 대표가 주장하는 상향식 공천이 채택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결국에는 당원투표와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경선과 사실상의 전략공천으로 후보자가 결정될 것인데, 어느 경우에나 대구와 경북은 ‘박심’과 친박의 조직력이 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이재만씨 같은 친박 낙하산을 투입하는 구상을 기획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원대한 밑그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서울 강남 3구와 비례대표 공천에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해서 내년 총선에서 여당의 최소 목표치인 180석 중 90석 이상을 친박 의원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대구·경북과 강남 3구 그리고 비례의석을 합치면 이런 계산이 나오기 때문에 그럴싸한 이야기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계속 지리멸렬한다면 새누리당은 200석 이상을 차지할 것이며, 그러면 이원집정부제 개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원집정부제 개헌과 관련해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20세기의 최대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에서 비롯됐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이원집정부제 정부를 택한 바이마르 헌법이다. 이론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었다. 의회는 철저한 비례대표성 원리로 구성됐고, 의회 다수파는 내각을 구성했으며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했다. 대통령은 국가안위에 관한 권한을 가졌고 내각은 내정을 책임졌다. 하지만 지나친 비례대표제로 인해 의회는 불안한 연정에 의존해야만 했고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관계가 불분명했다. 정국이 불안해지고 경제위기가 심화되자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국민들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을 선택해서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는 데 동의하고 말았다. 독일인들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결과는 나치의 학정과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이었다.

‘배신의 정치’ 발언에서 시작된 친박 낙하산 공천이 국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은 더 이상 허황된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이원집정부제는 매우 불안한 정부 형태이고 그런 탓에 이 제도를 택한 나라가 별로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친박핵심이라는 의원이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공론화하고 나섰으니 혹시 박 대통령의 퇴임 후 구상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상돈 |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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