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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주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내뱉어진 단어를 집계해본다면 아마 ‘추워’가 단연 1위가 아닐까. 이사갈 때 유리잔이 깨지지 않도록 감싸듯이, 칭칭 둘러매어 완전무장한 이들의 깊숙이 숨겨진 얼굴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모자와 장갑, 내복과 문풍지로 달성하고자 하는 단열과 보온은 겨울철의 기본 대응책이다. 외부 기후와 관계없이 체온을 한결같이 유지해야 하는 정온동물의 운명은 어쩌면 이리도 가혹한가. 안에서 아무리 덥게 해놔도 밖에 나가자마자 추위를 타는 이 신체가 야속하기만 하다.
가만, 동물이라고 했겠다. 나만 따뜻하면 그만인 수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의 세상을 헤아려본다. 잔뜩 껴입고 난방기 바로 옆에 앉은 나도 오들오들 떠는데, 대체 밖의 녀석들은 어떻게 이 모진 겨울을 나는 것일까. 산책하러 나온 강아지들도 스웨터 하나씩 걸치고 있는 마당에, 야생동물이라고 해서 추위불감증인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땅속에 굴을 파거나 나무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있겠지, 하면서 염려한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사이에 눈이 내린다. 아침 해에 빛나는 새하얀 세상은 완전무결하게 아름답다. 소복이 쌓인 모습이 꼭 솜털이불 같아 괜히 더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로 만지면 얼마나 차가운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눈은 그저 비유적으로만 이불 같은 것이 아니다. 활용할 줄 아는 생물에게 눈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환경을 제공한다. 눈은 열전도율이 낮은 물질로서 흙 위에 쌓이면 눈 바로 아래의 지열을 유지시켜주는 훌륭한 단열재 역할을 한다. 이러면 바깥보다 소폭 따뜻한 눈 아래층에는 수증기가 생성되고, 이는 승화작용에 의해 위쪽으로 확산된다. 눈 표면에서 찬 공기와 만난 수증기는 압축되고 응결되어 단단해지고, 이렇게 됨으로써 단열효과는 배가된다. 이러한 수분의 수직이동은 점차 아래쪽에 공간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여기가 여러 동물의 겨울철 보금자리가 되는 곳이다. 온갖 들쥐, 뒤쥐 등의 설치류와 곤충, 거미 등의 무척추동물이 이곳에 머물며 식물의 뿌리껍질 등을 갉아먹으면서 겨울을 나고, 포식자들은 이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위에서 덮치거나 직접 들어가 사냥해서 추운 계절을 연명한다. 땅에서 생활하는 뇌조 등은 물론, 참새와 같은 새도 직접 눈 속을 파고 들어가 밤을 지내기도 한다. 북극곰도 눈으로 된 굴속에 5~6개월씩 틀어박혀 새끼를 키운다. 기온이 영하 50도에 이르는 극한적 추위에도 이 눈 속의 은신처는 0도 정도로 유지된다. 우리 기준에서야 여전히 추울지 몰라도, 야생 동물들에겐 버틸 만한 거처이다.
스코틀랜드 스털링의 동물원에서 팽귄이 눈사람의 당근 코를 빼려 안간힘을 쓰고있다(출처 :경향DB)
우리의 기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인간 신체의 모공 개수는 침팬지나 고릴라와 거의 같지만 대부분 피부 밑에 남기 때문에 보온엔 소용이 없다. ‘벌거벗은 유인원’으로 진화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옷가지와 외부 열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털을 사용하건 눈을 활용하건, 추위에 대응하는 원리는 같다. 찬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단열을 하고, 내부에서 형성된 열은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온을 한다. 놀라운 것은, 이 가장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겨울 생존의 법칙이 대한민국에서 내팽개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력난으로 인해 난방을 한 채 문을 열어놓는 가게들의 단속이 얼마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정 대상인 가게들마다 반응은 한 가지이다. “문을 닫으면 손님이 안 와요.” 이토록 어이없는 발언이 또 있을까. 첫째, 잠기지도 않은 문을 못 여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문을 닫아놔야 하는 카페와 식당은 텅 비어있어야 할 것 아닌가. 둘째, 소비 의사가 있는 사람 중에 문 열기 싫어서 구매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물건이 시원찮은 것이지 문이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셋째, 손님이 안 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올 사람은 오지만 그냥 흘러들어오는 사람까지 빠짐없이 건지고 싶은 욕심일 뿐이다. 넷째, 동문서답이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서 실시하는 것이지, 가게의 영업실적을 묻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함께 사는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자세이다. 다 같이 협조해서 보릿고개를 넘겨보려는 가족회의 자리에서 대뜸 “나는 배불리 먹을래”라고 얘기하는 뻔뻔스러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겨울은 추우니 문을 닫자.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이런 기초적인 명제마저 재확립되어야 하는 세상인가, 야생학교는 한탄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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