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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성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몰려든다. 커진 눈망울은 호기심을 충족하느라 여념이 없고, 들뜬 몸은 가만있질 못하고 왔다갔다 부산스럽다. 수족관이나 과학박물관, 생물체험관 같은 곳에서 주말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엄마, 아빠에게 연신 질문을 해대는 꼬마들은 답을 채 듣기도 전에 다음 칸으로 이동 중이다. 특히 공룡 뼈는 세대가 바뀌어도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구가한다. 사후에 이렇게 인정받을 줄을 꿈에나 알았을까, 공룡 녀석들이. 그런데 반나절 실컷 재미있게 놀다 가는 이 모습은, 한평생 일관되게 동물을 테마로 살아온 나에겐 가장 신기한 현상 중 하나이다.
애들이 공룡 따위에 열광하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모가 자식이 커서 되길 바라는 상과 무관하게, 어린 시절에는 늘 동물의 세계로 인도해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반대로 말해서, 동물에 신이 나던 그 많던 애들이 커서 다 뭘 하고 있나 의아한 것이다. 사회적 정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이 아이들은 마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한 아이도 빠짐없이 그대로이지만 소위 말하자면 좀 더 ‘철’이 들었고, 좀 더 어른스러워진 것뿐이다. 한때의 유치한 관심사와 취미는 졸업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사람구실하기 위해서는 보다 심각한 분야에 몸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이 갖고 있는 일종의 삶의 철학이다. 개중에는 이 대세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소수파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는 좀 더 나중의 시점에 전향하는 시한부 소수파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단연 먹고살기이다. 술자리마다 오가는 진솔한 대화에서 이 핵심어가 빠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나도 먹고살아야지!” 가장 기초적인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데, 그저 연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데, 여기에다 대고 뭐라고 할쏘냐. 생물의 대사와 생리에 대한 욕구는 정당화가 필요 없는 마땅함이다. 이토록 너무나도 근본적인 명제가 피어나는 이야기꽃마다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모두가 진짜로 음식 자체를 구하는 일이 그리도 고달픈 것인가?
사실은 정반대이다. 최소한의 생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목숨만 부지하기는커녕 체면과 성공욕을 정당화하고자 할 때에, 먹고살기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굴지의 대기업 임원이나 고액연봉자의 노고도 다 먹고살기 위한 소행일 뿐이다. 판사, 변호사, 의사와 같은 전형적인 인기 전문직을 선택하는 이유도 순수하게 먹고살기 위해서란다. 남에게 인정받고 남보다 부유하게 살고자 하는 가장 세속적인 정신을 미화하기 위해, 최저임금 생활자나 노숙자가 절절하게 꺼낼 말을 가로챈 것이다.
중견 배우 양재원씨가 힘없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출처 :경향DB)
정말로 밥만 있으면 충분하고, 그것 하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사는 동물을 생각하면 사람들의 이런 푸념은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끝도 없이 줄어드는 녹지에 매달려 점점 사각지대로 밀려난 동식물이야말로 말없이 생존권을 호소하고 있다. 사람살기도 힘든 세상에 웬 짐승까지 챙기나? 문제의 우선순위를 지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동물의 차례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연봉과 승진, 스펙 따위의 고민을 먹고살기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공룡화석에 넋을 잃던 아이들이 이 기형적인 생존경쟁에서 조금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중 한두 명이라도 커서도 공룡과 관계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 땅의 직업다양성은 풍부해질 수 있다. 생물다양성이 높을수록 생태계가 건강한 것처럼, 사회도 여러 다른 삶과 직종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을 때 발전한다. 인간사에 대해 무지한 동물학자의 망상만이 아니다. 최근 세계적 권위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한반도 특집 기사를 통해 한국의 성공은 깊지만 넓지 않다고 지적했다. 남한의 직업 수는 일본의 3분의 2, 미국의 38%에 불과하다고 한다. 좋아하던 것을 버리더라도 뱀의 머리보다 용의 꼬리를 고집하는 한국인들에게,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일침으로 이 기사는 말을 맺는다. 나름의 먹고살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이 곰곰이 반성해볼 만한 대목이다. 어쩌면 그토록 자주 입에 올리는 먹고살기가 정답인지도 모른다. 원래의 소박한 뜻에 맞게 삶을 단순하게 대하고 그에 흡족할 수 있다면, 실제로 모두가 함께 먹고살기 쉬워지지 않을까, 야생학교는 생각해본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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