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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집을 나선다. 조금 춥긴 하지만 옷깃을 여미고 씩씩하게 걸으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해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빈다. 콩나물시루처럼 운반되는 것이 대단히 유쾌하진 않지만 대도시에 사는 이상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교통체증도 참을 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여지없이 나의 아침을 망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뭔고 하니 바로 성형수술 광고다. 불행히도 한국의 성형수술 메카인 서울 강남 및 압구정 일대를 자주 통과해야 하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마다 이 저주스러운 기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곤욕을 치른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대문짝보다 훨씬 큰 광고판은 지하도 양쪽을 도배하고 그 기괴한 눈과 코를 내게 들이민다. 눈을 감아 시각정보를 차단하려 하면 버스의 음성광고가 고치라며, 뜯어 고치라며 나를 괴롭힌다. 이어폰을 꼽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나는 소음차단용 음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고요하고 맑은 아침으로 하루를 열고 싶은 사람이다. 이곳이 모닝 캄(Morning Calm)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모두가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인가? 지하철에서 눈을 둘 곳을 찾으며 나는 묻는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수용하기로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공장소를 성형 홍보관으로 칠갑을 하겠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양과 질의 성형 칭송 메시지가 우리의 일상을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의술로 얼굴을 고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원래 세상에는 별의별 업종과 서비스가 있고, 사회가 분화될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진다. 문제는 돈과 기술을 이용해서 인간 정체성의 핵심인 얼굴을 조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지고, 너무나도 버젓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형외과 간판과 버스 광고(출처: 경향DB)
언제부터인가 성형은 인간의 당연한 관심사이자 생활영역인 것처럼 우리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성형 광고는 맛있는 음식이나 저렴한 통신요금, 꿈의 여행지를 알리는 광고와 동등한 위상을 누린다.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다소 ‘중립적’인 표현을 쓰던 것은 옛말, 오늘날의 성형 광고 문구는 온 국민을 마치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듯 훈계하고, 훈육하고, 격려한다. 살과 뼈를 깎음으로써 ‘숨겨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되찾으라’고 하며, 남을 질투할 시간에 주저 말고 ‘지금 행동하라’고 다그친다. 심지어는 성형 선생님의 ‘정성’을 부모님의 사랑과 스승님의 은혜와 동격으로 추앙하는 대담함까지 보인다.
얼굴 바꾸기가 이토록 가벼운 일이라면, 대체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하기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래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토록 아무렇지 않다면 ‘진짜’와 ‘짜가’의 구분에는 왜 그리도 집착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찌든 사회를 탓하며 칼날에 몸을 맡기는 이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당당하기 위해’ 신체를 찰흙처럼 주무르는 것은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스포츠 선수의 약물투여, 학력위조, 허위광고를 지탄하는 데에는 여념이 없다. 술, 담배, 연애는 못하게 해도, 수험생의 노고를 성형 선물로 치하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식 사랑의 마음이란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X는 한때 백인처럼 머리를 펴기 위해 양잿물로 된 콩크라는 젤로 머리를 감았다. 하지만 훗날 그는 백인으로부터 받은 성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자신의 흑인 조상을 기리는 뜻에서 ‘X’라는 성을 채택했다. 자신의 기원과 정체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언젠가 성형 사실이 탄로날지도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성형을 주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고수하고, 나로 남고 싶은 마음이 이 성형 아우성에 불편해하는 것이다. 성형업계의 난잡한 메시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라는 말 하나로 귀결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강산, 있는 그대로의 풍경, 있는 그대로의 동네가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머리카락 하나조차도 소중히 여기며 당나라식 변발을 거부했던 우리의 정신은 대체 어디로 다 자취를 감추었는지 알 수 없다. 빠른 변화를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자기부정을 심어준 것은 아닌지 돌아봄이 절실한 때이다. 적어도 나의 소박한 아침 등굣길 정도는 이런 무거운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야생학교는 소망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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