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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세계는 분노하고 있다. 군위안부 강제동원이나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아예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에 우리는 아연실색한다.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의 결여만큼 사람들의 폭발적인 분노를 사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반인륜이라는 말이 사람 인(人)자를 쓰기 때문일까? 어쩌면 인간과 과거사에 치중한 나머지 지금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에도 우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무덤덤해져 있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내 주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이 참담한 광경을 얼마나 더 봐야 이에 응당한 분노를 느낄 것인가? 그저 행정적인 ‘처분’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당하는 이 대학살은, 이 시대의 가장 검은 비극이자 소위 문명이라 스스로를 부르는 이 사회의 가장 섬뜩한 위선이다.
생과 사. 대체 누구의 소관인가. 콜로세움 한 중간에서 헐떡이는 검투사를 보며 엄지를 위로 치켜세울 것인지 아래로 내릴 것인지 결정하는 로마 황제의 모습. 과연 우리는 그 시대에 비해 발전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가. 적어도 로마 황제는 한 번에 한 사람씩을 ‘살처분’했다. 반경 3㎞ 안의 모든 개체를 숙청하는 따위의 만행은 그 악명 높은 칼리굴라도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당국은 사태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 한다. 그런데 재앙은 이미 도래하지 않았는가? 아니, 멀쩡한 닭과 오리 수십만 마리를 우리 손으로 생매장한 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이 재앙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퍼지도록 한 것도, 무고한 가금류를 대량살상하기로 한 결정과 집행도, 모두 인간이다. 이 사태에서 불가항력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늉으로 책임을 면해보려는 시도일랑 생각도 말자. 저승사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수도권 첫 AI 의심 닭 예방적 살처분(출처: 경향DB)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이 정도로 강력해지고 지구적으로 창궐하게 된 압도적인 주원인이 공장식 축산과 유통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자연 상태의 조류 개체군은 유전적 조성이 다양해서 한 가지 바이러스에 몰살당할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오직 알과 고기의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인공선택된 양계장의 포로들은 유전적으로 너무나 취약해서 병원성 물질의 침투에 속수무책이다. 날개를 제대로 펼 수조차 없는 공간에 평생을 살며 운동부족에 시달린 이들의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저항성이 없고, 이를 억지로 얼버무리기 위해 투여되는 각종 항생제와 호르몬제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환자나 다름없는 이들은 서로 격리되긴커녕 완전 밀착·밀집된 채 서로의 배설물에 뒤범벅이 되어 그 삶 같지도 않은 삶을 잠시 누린다.
이런 맥락에서 1996년 고병원성 H5N1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곳이 위생 상태와 사육조건이 매우 열악한 중국 남동부와 아시아 지역의 가금농장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가금의 공장식 축산의 열렬한 선도국가 중 하나인 한국은 조류독감이 처음 발생한 200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500만 마리의 가금류에게 매립사형을 선고하는 경기(驚氣) 반응을 일으켰지만, 이 중 실제로 감염된 개체는 121마리에 불과했다. 대체 이게 어떤 의미에서 ‘대책’이란 말인가? 정신이 혼미해진다. 벼룩이 왜 생기는 것인지는 완전히 잊은 채, 초가삼간은 물론 나라 전체를 태우고서도 스스로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고 있다. 마땅히 ‘처분’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닭이나 오리가 아니다.
우리의 경악스러운 뻔뻔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폐사한 가창오리 몇 마리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검출되자마자 온 나라는 철새를 범조(犯鳥)로 지목하고 거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 오히려 야생조류가 가축들로부터 감염될 수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생각조차 막무가내로 거부할 것인가? 세계 각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책임전가’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2007년 영국조류학회지 ‘아이비스(Ibis)’에 조류독감의 확산과 야생조류의 역할에 대한 리뷰논문이 발표되었다.
야생 철새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병의 양상은 철새의 이주패턴과는 잘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금 유통 및 수출입과 같은 인간 상업행위의 시공간적 분포와 강하게 일치한다고 이 연구는 결론지었다. 야생조류가 독감의 전파에 기여한다고 해도 국지적인 수준이며, 전 지구적인 판데믹(pandemic) 유행병을 초래한 명백한 주체는 인간과 축산경제이다.
이제 제발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자. 아무렇지도 않게 치킨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축의 사육환경은 혁신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가격상승은 수용되어야 한다. 기존의 축산 시스템으론 안된다고, 지구가 호소에 호소를 거듭하고 있다. 이 목소리마저 땅에 묻어버리는 일은 하지 말자. 야생학교는 호소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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