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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니시카와 미와의 장편소설 <아주 긴 변명>이었다.

지난 2월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인기 소설가(사치오)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몇 번이나 울컥했다. 아예 책을 덮고 잠시 울기도 했다.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이었다. 자극적인 묘사도, 극적인 반전도 없이 여러 등장인물이 1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읽는 내내 세월호 이후의 현실이 계속 겹쳐 생각났다. 사실 소설과 현실은 거의 겹치는 장면이 없는데도, 갑작스러운 비극 이후 남아있는 자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구체성이 감정선을 건드렸다.

겨우내 광장에서 외쳤던 ‘박근혜는 내려가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는 구호는 봄이 오면서 실현됐다.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도착했고, 예정된 봄꽃축제를 취소한 목포 거리에 노란 깃발이 휘날리고, 하루 평균 1만여명이 목포를 찾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아직도 9명의 미수습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수부와 선체조사위원회의 불협화음, 선체 훼손 논란, 계속 나오는 의문의 동물 뼈까지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영화 <아주 긴 변명> 스틸 이미지

주인공 사치오는 아내가 죽을 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장례식 때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나 슬픈 척 연기를 했고, 장례를 마친 후 자신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고 반응을 살피는 비겁하고 열등감 가득한 인간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여전히 사고 당일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전직 대통령,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비하했던 공영방송 보도국장, 단식투쟁하는 유족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고 인증샷을 찍던 일베 회원들, 미수습자 가족들만 만나고 사라진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다행히 소설의 주인공은 죽은 아내 친구의 아이들을 보살피며 ‘감미로운 충족감’과 위로를 얻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면서 비극을 똑바로 마주하고 견뎌내는 법을 배우지만, 3년이 흐른 지금도 현실 속 인물들은 반성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출몰 중이다.

사실 일본 영화계는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일본이 겪은 ‘사회적 상실’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아주 긴 변명> 역시 ‘이 시점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감독의 무력감에서 쓰인 소설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한국은 세월호를 다룰 준비가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바로 얼마 전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해양재난’이라는 타이틀로 ‘함께 슬퍼할 수 있는 휴먼드라마’를 내세워 제작 계획을 발표했던 영화 <세월호>가 버젓이 후원을 받고 있었으니까. 비극적 참사를 상업영화의 소재로 이용한다는 논란에 휩싸여 후원이 중단되긴 했지만, 웃고 넘어갈 해프닝으로 취급하기에는 뒤끝이 너무 씁쓸하다.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바다 호랑이>(가제)를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무력감이 창작자로 하여금 이렇게 담담한 소설을 내놓을 수 있게 한 동력이라면, 한국 사회는 세월호를 세월호 자체로 바라보고 기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이 아내가 일하던 미용실에 뒤늦게 찾아가 아내가 늘 해주던 스타일대로 머리를 다듬고, 아내의 평소 사진을 받아와 인화해 액자에 담고 그제서야 늦은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끝난다.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 회한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생각’하는 순수한 울음 그 자체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세월호 이후의 부재와 상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아직 세월호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기억할 장면은 여전히 많다. 우리는 아직 그 기억들에 대해 제대로 기록하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미수습자 다윤이 어머니의 절규에 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 말이다. 누군가는 사과 대신 ‘아주 긴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든 들을 준비는 되어 있다. 다만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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