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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9월27일 조선 숙종의 사망 소식을 청에 알리기 위해 파견된 연행사의 정사 이이명, 부사 이조, 서장관 박성로, 아버지 이이명을 따라온 이기지가 북경의 천주교 남당을 방문한다. 포르투갈 신부 수아레즈, 마갈렌스, 카르도소, 그리고 독일 선교사 쾨글러가 이들을 정중히 맞았다. 이기지는 1720년 7월27일 출발부터 1721년 7월1일 귀국에 걸친 일지를 기록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기지는 일행이 돌아가고도 홀로 남아 서양인과 수다를 떨었다. 간식도 나왔다. 노란 빛깔이 인상적인 과자, ‘계란병’으로 기록된 과자였다.
이기지에 따르면 “부드럽고 달콤하며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풀려 정말 색다른 맛이었다”. 만드는 법을 물으니 설탕, 계란, 밀가루를 섞어 만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영락없는 스펀지케이크 또는 카스텔라이다.
순간 이기지의 머릿속에 계란병의 기억이 반짝했다. 숙종이 말년에 입맛을 잃자, 어의 이시필이 계란병을 만들어 본 것이다. 이시필은 북경에서 계란병을 접한 바 있다. 그러나 제맛은 나지 않았다. 어디서 실패했을까? 당밀을 잘 뺀 설탕도, 제과용 밀가루도 조선 사람이 쉬이 얻기 힘든 재료였다. 어깨너머로는 어떤 품위의 재료가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리라. 계란이 있다 해도, 계란을 거품이 나게 치다 반죽을 이루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다.
스펀지케이크며 카스텔라를 굽기까지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조선의 문호가 열리자 정제당과 구미산 과자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제과 기술이 있는 화교와 일본인도 조선에 들어왔다. 가사 실습에도 제과가 껴들었다.
이윽고 1921년, 일찌감치 조선 음식의 체계화에 뛰어든 방신영 선생이 <조선료리제법>(광익서관판)에 전통적인 병과와는 구분되는 서양 과자 제법을 싣기에 이른다. 선생의 ‘조선료리’란 조선 당대의 요리였다. 이 책에는 카스텔라, 팬케이크, 컵커스터드, 코코아케이크, 초콜릿케이크, 버터케이크, 롤스펀지 등 다양한 서양과자 또는 일본식 양과자가 등장한다. 아울러 버터, 마가린, 라드와 같은 새로운 유지에 팬, 제과용 성형틀, 화덕 등 새로운 용구의 쓰임이 자세히 소개된다. 계란과 우유를 과자에 쓴다는 감각도 전에 없던 것이다. 이때 카스텔라는 가장 많은 문단이 할애된 과자였다. <조선료리제법>의 카스텔라는 거품기로 계란을 치고, ‘상등 밀가루’를 풀어 반죽을 만들고, 틀에 버터를 발라 화덕(오븐)에 앉히고, “한 반 시간쯤 구운 후 지푸라기로 찔러 보아 속이 다 익었거든” 완성되는 ‘상등 과자’였다. 이시필이 계란빵 굽기에 실패한 이후, 조선 사람이 카스텔라의 재료와 제법을 정확히 기술하는 데 이르기까지 실로 200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고는 백년쯤 흐른 오늘, 카스텔라는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나쁜 화제로 떠올랐다. 이제 누가 무슨 말을 붙이든 애초에 나쁜 화제를 만든 쪽만 좋은 일 시키는 눈치다. 기획한 쪽에서 바란 ‘노이즈 마케팅’의 승리 아닌가. 몇 백년 전 카스텔라의 시초, 그리고 나열할 수 있는 모든 제법을 따지는 말도 허무하다. 이 땅의 제과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꽃핀 케이크류와 카스텔라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와 시각 때문이다. 어느 민족이나 둥근 물체를 차고 놀았다. 그렇다고 둥근 물체 차고 놀기 일체가 곧 축구는 아니다. 김치에 대한 고민은, 김치라고 하기 뭣한 아득한 김치의 원형도 아니고, 기무치도 아니고, 김치에서 시작할 일이다.
방신영 선생은 주의사항을 곳곳에 묻은 카스텔라 항목을 이렇게 마쳤다. “주의치 아니하면 되기는 할지라도 잘되지 못할 염려가 있느니라.” 카스텔라를 둘러싼 나쁜 화제를 뒤쫓은 담론은, 카스텔라의 정체와 속성을 고민하고 카스텔라 ‘되기’만이 아니라 ‘잘되기’에 애쓴 제과 전문가를 유령 취급했다. 제과사의 말은 간단히 생략됐다.
음식을 쉽게 보는 세태도, 서민대중이 무작정 음식업에 뛰어드는 현실도, 싸고 양 많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주술에 지핀 소비자도 아리고 쓰리다. 그 틈에서 챙길 것 챙기는 먹방에 소름이 돋는다. 그 뒤를 쫓아가는, ‘염려’보다 자기현시가 돋보이는 2차먹방, 파생먹방도 아리고 쓰리다. 내 뒷북 또한 그리 되지 않을까 염려할 뿐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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