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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따스한 우리 집 바깥에서 좁은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는 신문 배달부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는 몇 시에 일을 시작했을까 생각하는 사이 동이 튼다. 베란다 밖에선 버스가 정차했다가 출발하며 오늘의 순환을 시작한다. 오늘은 반올림 스타일로 머리를 묶어달라는 딸아이와 한번만 더 놀고 씻겠다는 둘째를 달래 안락한 집을 나선다. 큰아이는 학교로, 막내는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 나와 함께 차에 올라타고 아파트 정문을 지난다. 흰머리만 조금 남아 있는 경비원에게 인사까지 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던 세계에서 나와 공허한 명랑함이 깃든 도시로 들어선다.
활기찬 공기에 어쩐지 한기가 서려 있다. 흰 장갑을 끼고 신기한 것에 올라탄 ‘야쿠르트’ 아주머니, 막 지나가는 지하철, 택배 오토바이를 보며 환호하는 막내를 데리고 비로소 어린이집에 들어서면 선생님이 다가와 따뜻한 세계로 아들을 데리고 간다. 잠시 들른 카페에서 주문받는 점원의 핏기 없는 열정을 어색하게 느끼고 있을 때 잘 아는 연구교수를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다. 그녀가 불안한 고용상태 때문에 하고 싶은 연구가 미뤄지는 자신의 처지와 개학하고 내내 분식집에서 저녁을 사먹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 처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아픈지 저울질하는데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의 세계는 어째서 그의 것보다 안정적이어도 되는 것일까. 도망치듯 헤어지고 강의실에 들어선다. 미래를 꿈꾸는 학생들이 한가득 앉아 있다. 이들에게 최고치를 경신 중인 한국의 청년실업률, 그리고 저임금 일자리로 여러분과 같은 청년이 집중되고 있다고 설명하자 공중에서 두 개의 세계 같은 것이 잠시 엉켰다가 풀어진다.
기이하다고 생각하며 다음 일정으로 발을 옮긴다. 오늘은 학교 내 청소미화원과 경비노동자의 노동 현실을 들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 청소미화원이 자신의 동료가 강도 높은 노동을 하다 쓰러져 지금은 반지하방에 누워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경비노동자가 자신의 월급은 왜 그렇게 낮은지, 대학이라는 한 공간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하는 사람의 월급이 왜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야 하는지 묻는데 내 목에 뭔가 턱 걸린다. 말끔히 청소된 나의 밝은 세계와 더러운 것들을 청소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세계가 포개졌다가 다시 갈라선다. 집으로 가기 전 들른 마트의 계산대 앞 중년 여성은 나와 눈을 맞출 새가 없다. 줄줄이 서 있는 고객들은 이미 바쁜 발을 구르고 있다. 5000원 남짓을 손에 쥐기 위해 손수레에 위태롭게 쌓아올린 폐휴지를 억척스럽게 끌고 가는 노인을 오늘도 어김없이 만난다. 아슬아슬하게 나의 세계로 들어오니 불편한 안도가 집 한가운데에 서려 있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70%가 임금노동자인데 이중 절반에 가까운 45%가 비정규직이다. 2000만명 중 1000만명 가까이가 불안정하게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30%는 자영업에서 일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90% 이상이 종업원 5인 미만의 영세자영업이다. 신문 배달원, 버스기사, 경비원, 야쿠르트 아주머니, 지하철 기관사, 택배 청년, 기간제 교사, 어린이집 선생님, 카페 점원, 비정규직 연구자, 청소미화원, 마트 계산원, 폐휴지 할아버지와 같이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그 숫자를 만든다. 이런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은 임금이 낮고 고용관계도 불확실하며, 사회보험에서 제외돼 있다. 한마디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지옥 같은 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색깔과 감촉이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어떻게 이토록 가까이에 공존할 수 있을까. 불안정노동자 50%라는 그 단순해 보이는 숫자 뒤에는 하나같이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세계는 그 이야기들이 겹겹이 더해져 색이 더 어두워진 다른 세계 때문에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존의 골목을 지나면 공멸이 기다리는 것은 아닐지. 두 세계가 서로 만나 화해할 수는 없을까.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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