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작년과 올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할 일이 생겼다. 해당 프로그램을 봤다는 지인들의 피드백을 종종 접하는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들 중 대다수가 나의 ‘분량’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시작할 때 협약한 회차당 출연료가 있고, 그것은 고정됐다. 내 모습이 방송에 좀 더 빈번하게 나온다고 출연료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분량이 뭣이 중요한가?
내게는 출연료가 방송 출연의 제1목적이다. 계기가 있었다. 내가 보드게임 ‘수저게임’을 기획·제작한 뒤였다. 모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수저게임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연락이 와서 만난 적 있었는데, 그때 제작진으로부터 약속받은 내용이 방송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나는 느꼈다. 약간의 소음과 감정 소모 뒤, 결국 아이디어 제공자 표기에 대한 서로 간의 이해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하며 일단락됐다. 같은 해 하반기에도 수저게임과 유사성 있는 게임을 핵심 축으로 삼은 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거기에는 아예 수저게임을 ‘참고’했다는 표기마저 없었다. 그 제작진과도 방송 기획 단계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그들은 내 진행 아래 수저게임 플레이를 했고, 숱한 질문 뒤 더 참고하겠다며 수저게임 키트도 무상으로 빌려갔다가 내가 돌려달라고 연락하자 그때서야 보내줬다.
모순을 감지했다. 제작진 미팅 때 “(내가 방송에 협조한 바가 있는 만큼) 방송 영상을 필요할 때 활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원작자’(방송에는 따로 표기하지 않았지만 구두로는 원작자임을 인정한 셈인가?)이니만큼 최대한 예우하겠지만, 그때 돼서 다시 본사와 얘기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방송사는 영상 사용권이라든지 포맷 판권이라든지, 본인들 권리 구사에는 적극적이지만 독립기획자 및 예술가의 콘텐츠에는 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소모품으로 사용할 뿐이라는 아이러니.
공공기관의 지원금 없이 독립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개인의 작업이 나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을 때, 혹은 재밌어 보일 때 보수를 받지 않고 참여한다. 나 역시 자본 없이 혈혈단신으로 콘텐츠를 만들 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국 본사는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직원 연봉도 수천만원, 제작비도 회당 수천만원 책정된다. 거기에 출연료 예산은 포함돼 있으나 ‘자문’이나 ‘참고’를 위한 예산은 없는 것일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내놓고 싶은 욕망을 가진 개인의 고민과 시간 투여가, 더 많은 경제적·사회적 자본을 가진 주체에 의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레퍼런스’로 귀결된다는 것에 모멸감을 느낀다. 해당 방송만이 기억되고 원작자는 잊히는 상황도 부당하다. 꼭 그렇게 다 가져야만 속이 후련했냐!(feat. 김래원)
모티브에 대한 언급, 크레디트 표기, 원작자에 대한 예우 등 추상적이고 가치 중심적인 약속 뒤에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 실망하는 일을 적잖이 경험하고 빈번히 목격했다. 이제 나는 뚜렷하게 손에 잡히는 물질을 믿기로 했다. 만약 앞으로 방송사에 ‘쓰임’ 당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돈이라도 챙기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방송 출연의 목적이 그뿐만은 아니다. 의견을 전하고픈 욕망도 있다. 그래서 지금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도 (때론 함께 출연하는 패널들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발언했다. 힘 있는 주체에 의해 약소한 개인이 착취당하는 사례, 종교단체의 성소수자 기본권 침해, 주거 빈곤 문제와 젠트리피케이션 등을 줄기차게 거론했지만, 많은 부분이 편집되고 있다…. 한정된 방송 시간, 좀 더 흥미롭고 매끄럽게 완성해내야 함을 알기에 이해한다. ‘이 정도면 꿀알바다’ 싶은 정도의 출연료 덕에 내 도량이 넓어진 것일 수도….
방송에 이용만 당하지 않겠다. 나도 의견을 널리 전하기 위해 방송을 활용하겠다. 다만 그것에 너무 큰 기대를 갖지는 않는다. 내가 최종 편집권을 가진 통로를 통한 발화와 독립적인 창작을 더 중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콘텐츠는 또다시 보상 없는 레퍼런스 제공으로 귀결되려나?
방송 기획에 도움을 준 예술가에게 (비단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도) 합당한 보상이 돌아가지 않은 일을 최근에도 목격했다.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방송사들의 자성과 체계적인 매뉴얼, 관련 예산 편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이 뱉어낸다, 나는 버텨낸다 (0) | 2017.04.13 |
---|---|
슬프면서 좋은 거 (0) | 2017.04.11 |
‘아주 긴 변명’이라도 듣고 싶다 (0) | 2017.04.04 |
아리고 쓰린 카스텔라 담론 (0) | 2017.03.30 |
낭만적 사랑과 결혼시장 (0) | 2017.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