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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되풀이되는 로맨스의 공식처럼 누구나 현실의 누추함에서 나를 구원해줄 멋진 이성과의 사랑과 결혼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분과 인종, 문화 차이 등을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즉 어떤 사회에서든 모든 것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는 열정적 사랑이 결혼의 합당한 관습으로 인정된 적이 없다는 것이 사랑 연구자의 연구 결과이다.

과거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결혼계약의 기초가 된 것은 경제와 신분을 둘러싼 가족 간의 거래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계급과 부의 결속이 아닌, 개인의 의사에 바탕한 ‘자유연애’가 결혼의 조건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들어서이며 우리의 경우 이광수의 <무정>이 나온 뒤로도 지난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젊은이들은 최초의 근대인들이 환호작약했던 것처럼 사랑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삼으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각종 자료를 보면 서양은 90% 이상, 우리의 경우 70% 이상의 청년이 ‘부모가 반대해도 결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실제 결혼 당사자들이 순수한 사랑만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부모를 대신해서 스스로 결혼조건을 따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시장’, 즉 결혼을 교환과 경제관계의 산물로 보고 있는 연구자 준 카르본과 나오미 칸에 의하면, 미국의 현재 결혼시장은 19세기 이전의 신분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즉 자유연애라는 근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낭만적 방식이 아닌, 계급 장벽을 높이는 현실적 방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책 <결혼시장>(시대의 창, 2016)에 의하면 결혼시장의 현재적 동향은 미국의 불평등과 계급격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결혼연령이 높아지고 결혼율은 낮아지며 이혼율은 높아지고 있으나, 이 일반적인 통계가 모든 계급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상층, 즉 소득분위 상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집단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이혼율, 혼외출산율이 낮아졌으며 결혼과 가정을 중시하고, 그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하위 3분의 1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집단의 경우, 결혼율은 급격히 낮아졌으며 혼외출산율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우 전체 출산의 70%, 고등학교 중퇴자의 96%를 차지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의 가족 재구성이 철저히 미국 경제적 변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고소득층이 더 결혼에 충실하고 계급 장벽을 높이게 된 것, 그리고 극빈층에 거의 결혼이 사라지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꼽고 있다.

실업이 하층민 가족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이들의 분석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의미하게 적용될 수 있다. 청년실업자 수 100만9000명(2017), 비혼 여성 35.5%(2010), 출산율 1.17(2016), 그리고 지난해 혼인율이 역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최근 통계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정이 한국 청춘들을 결혼과 출산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여성의 비혼을 고스펙 탓으로 돌리고 하향 결혼을 권장하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자는 국책연구기관의 백색 음모론, 행정자치부의 ‘가임기여성분포지도’ 등은 아직도 결혼과 가족을 개인의 문제와 문화현상으로, 또는 생물학적 세포로 보고 있는 안일한 사고방식이다. 또한 고스펙이라 하면 다 골드미스일 거라는 생각도 착오다.

사람들은 준과 나오미의 분석이나 각종 통계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여전히 신데렐라 드라마를 즐기고 있을지라도 내게 주어진 현실적 선택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선택지에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면? 합리적 판단을 하는 여성이라면, ‘낭만적 사랑’에 눈이 멀어 경제와 육아를, 게다가 성인 한 명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무모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비혼 현상은 ‘그럭저럭’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가진 남자와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괜찮은 여성 일자리가 없는 탓이지, 여성의 눈이 높아진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는 중산층의 붕괴, 격변하는 한국의 결혼시장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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