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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던 4·13 총선이 끝났다. 여당 압승이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총선 전 이 지면에서 “이변을 기대한다”고 썼던 나의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넘어선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클릭한 정의당을 제외하고 노동이나 환경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진보정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왜 ‘진보정당’은 유권자를 매혹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보정당’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보정당’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 ‘의회정치’라고 부르는 민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투표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말만 총선이지 실질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체력장’에 가까웠다. 유권자들은 권력교체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사분오열되었을망정 야권에 표를 몰아주었다. 박근혜 정부와 집권여당에 대한 반감이 선거제도를 통해 표출되었다는 진단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총선 이후 추락하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론은 여야의 대립구도에 주목해서 여소야대 정국의 탄생을 집중 보도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누가 여당이고 누가 야당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다. 국민의당이야말로 바로 이 혼돈 상황의 의미를 말해주는 증거처럼 보인다.

분명 국민의당은 새누리당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 상황을 두고 과거 자민련과 국민의당을 빗대는 평가도 있지만, 초록이라고 다 똑같은 색은 아니다. 자민련과 국민의당이 얹혀 있는 정치적 지형도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총선은 정권교체에 대한 유권자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대통령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와 장기집권 음모론을 단숨에 날려버린 선거였다.

여하튼 유권자가 바란 것은 정권교체였고, 거기에 합당한 ‘인물’에게 표를 던져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중요했던 것은 정당이었다기보다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만들 정치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당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선거 결과는 집권여당보다도 야당에 차기 ‘대통령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태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 ‘부동층’의 향배가 여야 정권교체를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 ‘부동층’에게 사실상 여야는 따로 없다는 점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 역시도 뚜렷한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실은 서로 다른 정치인 개인의 역량들이 각축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라는 변수도 있지만, 역시나 이번 총선에서 ‘북풍’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여전히 진보적 의제는 선별적이나마 보수정치인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동원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급진적인 의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당해서 처음부터 배제될 것이다. 뚜렷한 의제의 방향이 없는 선거는 결국 역량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로 수렴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총선을 거치면서 정당은 표를 가졌지만, 정작 그 표를 받은 정치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대체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인지, 이 궁금증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차기 대권주자들 역시 차기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게임에 뛰어들 채비를 차리느라 분주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역량이 선거 결과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유권자들이 정당에 표를 던진 이유는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최선의 답을 찾은 결과일 뿐이다. 선거는 유권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라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 이외의 답을 말할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게다가 다수가 선택한 의제 이외에 다른 것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의 비밀은 이것이다. ‘진보정당’이 지금 정치구도에서 언제나 찬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선거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답 내에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규칙은 새로운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인 셈이다.

전 체코공화국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를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실현하는 예술이 바로 정치라는 의미이다. 이런 정치의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는 예술가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벨의 주장이었다. 그 덕목이란 지금 자신의 처지와 전체를 연결해서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수의 재편이 가져온 새로운 국면이 그냥 ‘대통령 뽑기 게임’으로 끝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리멸렬함에 빠져 있는 이 사회에 새로운 생각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출현할 수 있을지 관심 깊게 살펴볼 일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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