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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 낯선 동네에서 ‘어리바리’할 때 아버지의 조상 덕을 보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학원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냥 눈에 띄는 국어학원이 있어서 큰아이를 보내 보았고, 큰아이도 그럭저럭 흥미를 붙이며 재밌게 다녔다. 어느 날 내 아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어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정현이 엄마가 내 아이랑 같은 풍향 조씨니까 알려주는 거예요. 안 그러면 누가 이런 거 일하는 엄마들한테 알려줘요? 정현이가 지금 OOO 국어논술학원에 다닌다고 했죠? 거기는 한 10년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별로예요. 그러니까 빨리 그 학원 끊어요. 어휴, 누가 이런 것 가르쳐줘!” 호주제도는 폐지됐지만 아버지 성은 잠시 나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마음이 씁쓸하다.


한국사회는 199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 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면서 정치, 경제와 교육 분야의 경쟁을 더욱 부추기게 됐다. 학교 급우, 동료, 주변의 내 잠재적 경쟁자를 밟고 가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져가고 있다. 부모들도 자식을 소위 명문대에 진학시키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기 위해 무한경쟁사회에 편승해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가족은 적은 기회와 자원을 두고 혈연중심의 가족중심적 전략을 펼치면서 “내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 풍토가 자리잡아가고 있다. 따라서 아이의 엄마들은 각종 대학입시 관련 학원 등의 정보관리능력을 권력화하고 있다. 오로지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해.



최근 ‘태안 해병대 캠프’에서 공주사대부고에 재학 중인 2학년생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 TV와 인터넷, 신문지상에서 이 사고소식과 관련한 기사를 접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더군다나 자식을 둔 어느 부모가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난해에도 전과 22범의 민간업자가 국토대장정을 진행하면서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참가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지 딱 1년 만의 일이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또다시 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길 없을 때 해병대캠프로 자식을 먼저 보낸 유가족들의 사고를 마무리하는 입장을 보면서 무언가 변화를 느끼게 됐다. 그것은 “내 자식”을 넘어서는 ‘가족의 품격(品格)’이다.


해병대캠프 사고로 숨진 희생자 5명의 유가족은 ‘해병대를 사칭한 모든 캠프 중단, 책임자의 엄중 처벌, 죽은 아이들의 원한 풀기, 교육부의 책임 있는 사고수습, 생존자의 심리치료 지원’ 등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을 ‘청소년의 인권문제’로 정의내리고 있다. “내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부모의 망연자실과 비통함, 애통함을 넘어선다.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남은 생존자들의 안전한 생존을 걱정하는 모습,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서 진화한 부모와 가족의 태도에서 가슴 뜨거운 숙연함을 느낀다.


청소년은 성인의 보호를 받아야 할 미성숙한 미성년자로 있으면서 때로는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어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취급되기도 한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방학식까지의 기간에 ‘엄격한 군사훈련’을 통해 기강이 바로잡아져야 했던 대상으로 취급받았던 청소년들. 이렇듯 청소년의 인권은 어른들의 통제와 관리, 자율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해병대캠프로 숨진 5명의 아이들을 대한민국 어른들의 가슴에 또 한번 묻고 “내 자식” “네 자식”이 아닌 “우리 모두의 자식”이라는 유가족들의 품격 있는 모습에서 청소년들의 인권, 민주적인 학교교육, 공동체 의식 등에 대한 희망을 바라보게 된다. 아이들이 사선을 넘는 순간에 인간띠를 만들어 함께 살려고 했듯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국가를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거시적으로는 무한경쟁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 미시적으로는 관련 재발방지대책을 만들어가는 것도 성인들의 철학, 삶을 대하는 태도와 실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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