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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0년 가을에 갑상샘암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제주도. 지인에게 추천받은 제주 동북부의 조용한 마을의 펜션에서 3박4일을 묵으며 혼자만의 ‘쉼’을 가졌다. 마음껏 게으름을 부리며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숙소에 딸린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신 후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렸다. 그러다가 쉬고 싶을 때 잠시 쉬고, 전복죽이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보이면 식사를 하며, 푸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몇 시간씩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지금도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 잠시 눈을 감고 제주도에서의 나른하고 편안했던 일상을 떠올리곤 한다.


바야흐로 여름휴가의 계절이 도래했다. 휴가의 성격과 위상은 역사적으로 다르게 구성돼 왔다. 우리나라 법률에는 각종 휴가가 규정돼 있다. 일정기간 쉬며 느긋한 시간을 즐긴다는 의미의 휴가는 노동(시간)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휴가가 말 그대로의 휴가가 아닌 경우들이 많다. ‘배우자 출산휴가’는 남성배우자가 출산한 부인과 영아를 돌보는 또 다른 노동을 하는 것이다. 육아휴직도 육아라는 노동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휴가’라는 개념은 일터에서의 유급노동을 쉬는 것을 의미할 뿐, 휴가기간엔 통상 또 다른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집중적으로 하게 된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 법적인 휴가의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이고, 가족휴가, 여가가 국민들의 일상에 보편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주40시간 근무제, 일명 주5일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2004년 이후이다.


육아휴직 중인 류창승씨가 식품코너에서 장을 보고 있다. (경향DB)


최근 10년 동안 우리 사회에 ‘가족휴가’ ‘여가’의 개념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법적인 휴가개념도 내용은 ‘쉼’이 아닌 것처럼, 가족휴가가 여성에게는 또 다른 노동인 경우가 많다. 가족휴가의 시간, 목적지, 숙소, 교통편, 일정 등에는 계획·관리라는, 고도의 기획이 요구된다. 남녀 간 위계에 근거해 일정한 성별분업도 이루어진다. 목적지는 가장으로 의미되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고, 휴가일정을 전후해 각종 장보기와 쇼핑, 요리는 여성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며칠간 집을 비우기 때문에 신문과 우유대리점에 전화 거는 일, 화분에 미리 물을 충분히 주는 일, 반려동물을 돌봐줄 사람을 알아보는 일, 아이들 학원에 전화 걸어 휴가일정을 통보하는 일, 사춘기에 접어들어 가족여행을 꺼리는 아이들에게 가족휴가 같이 가달라고 설득하는 일, 부모님께 휴가일정을 알리는 일 등의 세심함이 요구되는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휴가길에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여성은 운전자의 폭발직전의 짜증과 화를 풀어주는 감정노동까지 담당해야 한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여성이 세탁기를 몇 차례씩 돌려가며 빨래를 하고 청소 등으로 마무리 노동을 담당함은 물론이다. 일상을 떠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맛보는 새로움이 마음을 들뜨게 하기는 하지만 여성에게는 휴가가 일종의 감정노동을 포함한 야외노동의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다.



휴가는 노동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에 ‘가족’ ‘휴가’의 의미와 성격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가족과 노동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굳이 별도의 휴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장시간의 고강도 노동이 사라지고 쉼과 휴식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들며, 가족단합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이벤트적 성격의 ‘가족휴가’보다는 가족구성원 간 평등과 자율이 스며드는, 가사노동이 공유되는 가족문화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전까지 여성에게 진정한 휴가는 혼자만의 여행 혹은 몇 명의 친한 친구와의 단출한 여행일 때 가능하다. 몇 해 전 수술이 나에게 준 선물(‘쉼’)이 있었듯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만 쉴 수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을 만큼만 아파서 입원하고 싶다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에 전 계층, 남성과 여성, 다양한 연령의 가족구성원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휴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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