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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원년이자 6월항쟁 30주년인 올해, 권력의 비리와 음모를 폭로한 ‘딥스로트(Deep Throat)’ 얘기가 많이 나왔지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 기자가 익명의 제보자를 보호하면서 붙인 별명이 ‘딥스로트’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시민의 탄생>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제보한 ‘딥스로트’를 다뤘습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논파할 수 있었던 것은 교도소 내에 ‘딥스로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박종철을 고문 치사한 수사관 2명에게 “당신 둘이 죄를 모두 뒤집어쓰면 1억원씩을 주고 가족생활을 보장하겠다. 조만간 가석방으로 꺼내 주겠다”는 회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보안계장이 이부영씨에게 알려주면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부영씨는 그 내부고발자가 ‘정의감이 강하고 굉장한 친구였다’며,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말하지요.

이 대목에서 불편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92년 2월 비전향 장기수 42명은 비전향을 이유로 30년 넘게 징역을 살리고 가석방과 감형에서 제외하고 무기한 독방에 넣는 등 인간 이하의 처우를 강요하는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박원순 변호사 등을 대리인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대공국장 출신인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씨는 헌법소원을 주도한 저를 비롯한 비전향수를 다른 교도소로 분산 이감시킵니다. 저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어 징벌방에 갇혔습니다.

보안과 지하에서 교도관이 “강용주씨 머리 길렀네, 짤라야겠군” 하면 “예, 자르세요” 했습니다. 거부하면 징벌의 빌미를 주거든요. 이송 보따리를 뒤져 물건을 압수하겠다면 그러라고 했습니다. 항의하면 덫에 걸려 징벌방에 끌려갈 수 있거든요. 그 교도관은 나를 운동장과 노역장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별채로 데려갔습니다. 창문조차 없는 ‘중벌자 수용 완전폐쇄 독거실’이었습니다. 거기엔 3명의 중징벌자, 3명의 정신이상자, 1명의 난동주모자를 수용하고 있었지요. “아무런 규정도 위반하지 않았는데 왜 징벌방에 넣었느냐”고 항의하는 나를 ‘지시 불이행’이라며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워 ‘개밥’을 먹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찾아와도, 민가협 회원들이 항의해도, 박계동 국회의원이 진상조사차 찾아와도 겨우 포승줄만 풀어주고 한 달 가까이 이 완전폐쇄 독거실에 저를 가두었습니다. 1992년 7월8일자 신문 기사입니다.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징벌방에서 전방을 요구하는 강씨에게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은 ‘여기에서 전방 갈 생각을 하지 말고 전향서를 쓰고 빨리 나갈 생각을 하라’고 전향서 쓸 것을 강요하고 전방을 아직 허가하지 않고 있다.”

제게 인간 이하의 가혹행위를 가한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K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6월항쟁의 ‘딥스로트’입니다. 1992년은 87년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적 전향공작이 사라졌다고 여겨진 시기였습니다. 광주나 전주로 이감 간 사람들은 징벌방 수용이나 전향 강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의 손으로 전향공작을 당했습니다.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 손에서 말입니다.

90년대 중반, 최형우 내무장관이 ‘말’지 인터뷰에서 “고문하면 안 되죠” 하다가 김삼석 남매 간첩단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지적을 받자 “그건 간첩이니 다르죠”라고 대답한 게 기억납니다. 저를 가둔 보안과장도 이러한 이중잣대를 사용한 것입니다. ‘민주인사’에게 잘해 주지만 나 같은 ‘조작간첩’에게는 가혹행위를 해도 된다는 거지요. ‘애국’과 ‘반공’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가혹행위의 당사자가 의인으로 나오는 KBS 다큐멘터리는 고문과 가혹행위를 겪은 나 같은 사람에겐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일입니다. 담당 PD는 인터뷰에서 “내부고발자가 사상범과 학생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다뤘는지 알고 있었다”며 “그는 가혹행위에 대해서 사죄의 말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편집하며 시간상 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진실을 포기했다”는 말처럼 모순되게 들립니다. ‘딥스로트’에 대해 몰랐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알면서도 그랬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민주인사’에게 잘해 준 보안과장이 조작간첩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이중잣대가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자연스레 통용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정의가 가끔씩만 이기는’ 불완전한 사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요?

가끔 이기는 정의를 위해 여전한 어둠과 부자유 가운데서도 저 푸른 감람나무를 바라봐야겠습니다.

<강용주 | (재)진실의힘 이사·아나파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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