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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탄원서를 보내주셨습니다. ‘#내가_강용주다’, 많은 분들이 해시태그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해시태그 중 특히 제 마음을 콕 찌른 내용이 있었습니다. ‘#강용주를 맘껏 놀게 하라.’ 비틀스의 노래 렛잇비(Let It Be)가 떠오르고 저는 우울해집니다.

이제 휴가철입니다. 여행이란 낯선 것과의 만남이면서 기존의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여행을 제한받고 감시당하고 보고해야 한다면, 휴식이나 충전이 아니라 또 하나의 굴레가 됩니다. 여행 갈 때마다 ‘이번엔 괜찮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어떻게 여행이 즐거울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 여름휴가 계획을 못 세웠습니다.

10년 전 쿠바를 한 달 다녀왔습니다. 물론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은 “쿠바에는 맛있는 ‘크리스털 마운틴’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 때마다 늘 준비하던 커피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쿠바에 가 보니 ‘크리스털 마운틴’이 없었습니다. 쿠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데 우리는 모두 거기 있다고 믿는 거였죠. ‘크리스털 마운틴’은 일본의 커피 수입상이 만든 상품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쿠바여행 동안 ‘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맛은 키스보다 부드러운’ 크리스털 마운틴을 한 번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번 보안관찰법 재판을 받으며 자꾸 ‘크리스털 마운틴’과 쿠바여행이 떠올랐습니다. ‘보안관찰법’은 참 어이없는 법입니다. 보안관찰법 폐지를 주장한다고 보안관찰 처분을 당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건 낯익은 논리입니다. ‘폐지나 개정’을 주장하면 긴급조치로 처벌하던 ‘유신헌법’이지요. 유신헌법이 폐지된 지 언제인데 그 쓰레기는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재)진실의힘 박동운 이사장님도 오랫동안 보안관찰 처분자였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8년 만에 출소한 그분을 보안관찰 처분한 이유는 ‘무죄를 주장하고 재심을 신청’했다는 것입니다. 2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에야 보안관찰 처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 ‘김제간첩단 사건’의 재심에서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세 분 중에 최낙전 선생이 계십니다. 9년간 억울한 징역살이하고 나온 세상은 ‘또 다른 감옥’이었습니다. 신고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정보과 형사의 조사에 시달려야 했지요. 보안관찰법의 망령에 쫓기던 최 선생은 출소 4개월 만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보안관찰이 내거는 ‘재범의 우려’는 한낱 핑계일 뿐입니다. 이 법은 국가가 조작한 사건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반성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놀러 갔는지를 신고하라고 강요합니다. 보안관찰법의 핵심은 ‘길들이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존재로 국민을 길들이는 게 목적이라는 거지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국가 권력이 오히려 주권자인 국민을 길들이려 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집에서 키우던 맹견이 시민을 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맹견이 사람을 못 물게 하려면 목줄을 채우고 입마개를 채워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하는 시민의 힘에 기반을 둡니다. 우리의 불복종은 바로 국가권력이라는 맹견의 목줄을 잡는 일이고, 입마개를 채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보안관찰이 제게 가장 힘든 건, 제 삶을 과거에 묶어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32년 전 남산 안기부의 고문, 14년의 비전향장기수의 상처투성이의 그 시절로 저를 되돌려 놓습니다.       

1999년 14년 만에 세상에 나온 후 10년 동안 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을 받아 2008년 가정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고문 피해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도 없던 우리 사회에 왜 치유가 필요한지를 열심히 얘기했습니다. 인권운동가, 정신과 전문의들과 함께 고문피해자 집단상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활동의 결과 고문과 치유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인권 이슈가 되었고 (재)진실의힘과 광주트라우마센터 같은 치유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의사로서 개인의 질병만이 아니라 사회적 아픔에 연대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보안관찰법’은 그 자유로운 일상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과거에 옭아매어 한 걸음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내가 보안관찰법을 생각할 때, 가장 화나는 지점이자 슬프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딛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Let It Be, 제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강용주 | (재)진실의힘 이사·아나파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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