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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동신고등학교 3학년, ‘내 영혼이 쨍 하고 금이 가 버린’ 기억. 그 5·18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았습니다. 1980년대 수많은 사람들을 군사독재와 싸우게 만들었던 ‘광주 비디오’를 만든 독일기자 힌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기사 김만섭 이야기입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켜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짓밟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다쳤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광주 밖으로 알려지는 걸 엄격히 통제했고, 가까운 순천 사람들도 뉴스에 세뇌되어 “서울에서 폭도들이 몰려갔다던데?” 얘기할 정도였지요. 그 학살과 야만의 한가운데서 고립된 광주 시민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습니다. “제발 바깥에 알려주시오. 여기 일은 여기 사람한테 맡기고.”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진실을 알려달라는 광주 시민들의 간절함은 평범한 소시민 만섭(송강호)을 변화시킵니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며 못마땅해하던 택시운전사 만섭은 ‘두고 온 손님’인 독일기자를 도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합니다. 5·18을 회고하며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최초의 엄청난 슬픔과 서러움”이라 했던 힌츠페터는 대학가요제를 꿈꾸던 광주 청년 재식(류준열)에게 말합니다. “뉴스를 내보내면 혼자가 아니게 될 거다.”

영화를 보고 온 날 저녁, <전두환 회고록>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결정이 났습니다. 5·18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내란 수괴’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나는)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치유하기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16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이)어디로 왔는데? 난 오늘 처음 듣는 말”이라고 북한군의 5·18개입설을 강력하게 부인한 그는 회고록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한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이미 가짜뉴스로 판명된 지만원씨의 주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지요.

전두환씨의 거짓말은 이어집니다.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일은 없다.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총을 겨누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는 아직도 누가 사격명령을 내렸는지 모릅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아직도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전두환씨는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회고록에서 단언합니다. 진실은 아직 거짓에 가려져 있고 5·18 희생자들의 상처는 여전히 깊습니다.

<택시운전사>와 <전두환 회고록>…. 문득 진실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피해보상, 기념사업이라는 광주 문제 해결의 5원칙이 떠올랐습니다. 이 중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왜 그랬는지 진실을 밝히는 일일 겁니다. 광주 택시기사 태술(유해진)이 서울 택시기사 만섭(송강호)에게 “머시가 미안혀라. 나쁜 놈들은 따로 있구만” 했던 그 진실 말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전두환씨가 회고록에서 거짓을 유포했듯, 박근혜씨가 ‘님을 위한 행진 곡’ 제창을 금지했듯, 가해자들은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고, 망각을 강요합니다. “이제 그만 화해해야 한다”든가, “이제 그만 용서하자”든가, “이제 그만 미래를 바라보자”면서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하며 “도망가라”고 외치던 광주 청년 재식(류준열), 반찬 없어도 맛있는 주먹밥 나눠주던 여학생…. 이들이 총 맞던 순간을 생생한 현재로 재현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올바르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을 기억하고 아픈 과거를 증언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여 다시는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야만 다시는 국가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삶을 짓밟는 야만의 시간이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억’은 망각을 요구하는 자들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저항입니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대고 위로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시대, 야만의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우리 모두의 시간여행입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우리 자신의 치유여행입니다. “함께 기억을 공유할 때, 어두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늘지만 선연한 빛이 떠오를 것이다.”(박동운의 논문 <생애와 국가의 품격>에서)

강용주 | (재)진실의힘 이사·아나파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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