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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는 ‘크리스털 마운틴’이라는 맛있는 커피가 있다고 하지요. 헤밍웨이가 좋아한 커피라고도 합니다. 10년 전 쿠바에 갔을 때 좀 사오려고 했으나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크리스털 마운틴’은 일본인들이 만든 상술이었고, 정작 쿠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커피였지요.

여기 ‘재범의 위험성’이라는 허위의 기초 위에 지어진 이상한 집이 있습니다. 그 집 밖으로 나가는 건 범죄고, 나가면 처벌한다고 합니다. 보안관찰법이라는 집입니다. 저는 보안관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는 내내 ‘크리스털 마운틴’이 떠올랐습니다.

법무부는 저에 대한 보안관찰 처분을 지난 19년 동안 모두 7차례 갱신했습니다. 2015년 7차 보안관찰 처분 사유는 ①신고의무 불이행 ②관련 조사 불응 ③반성이 없으며 보안관찰법에 대한 불복종 주장 ④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와 자주 접촉 등 모두 4가지였습니다. 이 중 ①과 ②에 해당하는 신고의무 불이행과 관련 조사 불응은 처분 사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입니다. ③과 관련해서도 대법원은 ‘양심 및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재범 위험성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보안관찰 처분 사유 중 법원의 판례가 없는 것은 ④뿐입니다.

경찰 동태보고서는 “고문 피해자 치유를 빙자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이 주축이 된 재단법인 ‘진실의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진실의힘’은 군사독재 시절 고문으로 간첩으로 조작됐다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분들이 국가에서 받은 손해배상금을 출연하여 만든 재단입니다. 자신의 상처가 누구보다 깊으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분들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진실의힘’을 통해 노력해 온 ‘상처 입은 치유자’들입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니 법적으로 죄가 없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을 만난 사실을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과 만났다’는 혐의로 둔갑시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흰색이 검은색이고 검은색이 흰색’인 세상에서나 가능한 논리입니다. 검찰은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왜곡한 경찰 보고서에 기초하여 ‘재범의 위험성’을 이유로 저를 기소했고, 1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33년 전인 19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을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재판부는 광주 시민 누구나 아는 31사단이 오치동에 있다는 사실이 군사기밀이라고 했습니다. 서점에 버젓이 꽂혀 있던, 5·18 진상을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의 내용이 국가기밀이라고 했습니다.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모순된 논리였지요. ‘A가 A이면 A는 B가 아니다(A=A이면 A≠B)’라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논리학의 기본 전제를 무너뜨리는 궤변이었습니다. 인류 이성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법정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알려진 것이 아니다’라는 정신분열병자의 헛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제게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라고 윽박질렀고, 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로부터 33년, 6월항쟁과 촛불혁명을 겪은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검찰은 ‘재범의 위험성’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다시 한 번 펼쳤습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이던 1985년 간첩으로 조작되어 1평도 안되는 독방에서 14년 동안 끊임없는 전향공작에 시달렸고, 1999년 출소한 뒤 지금까지 19년째 보안관찰법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보안관찰법은 제 삶을 악몽과도 같았던 과거에 묶어놓고 있습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누구고, 어디로 놀러갔는지 신고하라고 강요합니다. 제가 가장 화나고 슬픈 지점은, 아픔을 치료하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로서, 개인의 아픔만이 아니라 사회적 아픔까지 함께 나누고 더 나은 공동체의 삶을 만들어 가려는 저의 의지마저도 보안관찰법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안관찰법의 핵심은 ‘길들이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국민을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아마도 가만히 있지 않은 죄, 권력을 불편하게 한 죄일 것입니다. 보안관찰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란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 정면으로 위배되며, 그 뿌리를 갉아먹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재범의 위험성’은 고문 피해자로 14년의 청춘을 억울한 옥살이로 보낸 제가 아니라, 독재정권의 안기부 등 폭압적 수사기관과 그것을 조종하며 정치적으로 악용한 폭력적 국가시스템 쪽에 있는 게 아닐까요?

<강용주 | (재)진실의힘 이사·아나파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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