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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바닷가 언덕의 서재에서 등대로 내려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촐하게 떡국을 끓여 아침식사를 한 뒤, 어제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원고를 썼다. 오후에는 서재에서 잠시 벗어나 광안대교를 건너 이기대 기슭에 있는 작은 미술관으로 나들이 갔다. 바다를 건너기 전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 전시가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영화의 전당에서는 빔 벤더스 감독의 <에브리띵 윌 비 파인>이 막 상영을 시작했다. 고은갤러리에서는 <사진 미래색(色)>전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에는 드넓은 바다와 마주할 수 있는 전망대가 해운대와 태종대 말고도 여럿 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낙동강 하구 몰운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신선대, 그리고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이기대. 이기대 끝자락에 오륙도가 떠 있다. 오륙도에서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동백섬을 가운데 두고 해운대와 광안리 앞바다가 펼쳐져 있고, 바다를 가로질러 7㎞가 넘는 광안대교가 백색의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새해 첫날, 앤디 워홀의 팝 아트도, 빔 벤더스의 영화도, 미래 사진의 색감도 따돌리고 이기대로 향한 것은 그곳 P&O갤러리에 선보인 새로운 형태의 책 여행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독서나 글쓰기 행위와는 달리, 그림이나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현장으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스마트폰으로 즉석에서 영화를 찍고, 언제 어디에서든 원하는 영화를 호출해 감상할 수 있는 초고속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가 작품을 만나는 방식은 빛과 공기, 여백과 고요가 최적의 환경을 이루도록 설계된 갤러리나 영화관에서의 감상을 전제로 한다. P&O갤러리는 옛 동국철강 자리였던 용호동 선착장 기슭에 최근 문을 열고 있었다.

‘독자의 여정(The Journey of Readers)’은 책을 오브제로 고고학, 철학, 문학, 공예, 사진과의 만남을 시도한 전시이다. 프랑스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아티스트 나준기의 책을 향한 정신적, 물질적 오마주가 인상적이었다. 미디어의 디지털적인 속성인 속도를 버리고, 아날로그의 원천인 책을 질료로 천지창조, 피에타, 병마용갱, 햄릿, 아이다, 한자(漢字), 마그리트의 파이프까지 동서고금의 문화유산을 다양한 형태와 질감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독서 중에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들을 찰나적으로 포착하여, ‘영원’에 각인 찍듯 붙잡아 놓은 형국이었다.

불교에서 책 보시는 최고의 덕목으로 꼽힌다. 작가, 에디터, 북디자이너, 인쇄 제본 제작자, 서점 운영자, 독자로 연결되는 수많은 인연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나준기의 ‘독자의 여정’은 책종사자와 독자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책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놓아보고, 갈아보고, 붙여보고, 찍어봄으로써 과감하게 책과 만나 상상하고 표출하는 능동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하루하루 책과 함께 숨을 쉬는 독서가, 책애호가, 책수집가, 책생활자들에게 권한다.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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