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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문학평론가 poetica7@hanmail.net


 

제목은 어려웠고 포스터는 생경했다. 그렇더라도 영화 자체는 얼마간 익숙한 방식으로 찍었으리라 짐작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분노와 슬픔을 예감하면서, 그리고 그런 감정적인 반응에 머물고 말 나 자신을 미리 조금 냉소하면서. 그러나 영화 <두 개의 문>은 예상과 달랐다. 분노와 슬픔보다는 분석과 성찰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과 포스터는 정직한 것이었다. 이미 ‘씨네21’ 이영진 기자가 이 영화의 목표와 성취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요약했으니 인용으로 대신하자.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증명하는 방식에 있어 <두 개의 문>은 유사 주제의 다큐멘터리들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대개는 희생당한 이들의 편에 서서 억울함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에는 사지로 내몰렸던 철거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해자라고 불렸던 경찰들의 드러나지 않은 희생을 밝혀냄으로써 <두 개의 문>은 면죄부를 받은 국가폭력에 곱절의 중형을 선고하고자 한다.”(‘씨네21’ 858호)




이 말 그대로다. 보고 나니 ‘두 개의 문’이라는 제목도 이해가 됐다.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 4층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두 개 있었는데, 건물을 통해 진입한 특공대원들은 그 두 개의 문 중 어디를 열어야 망루로 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진압 지도부는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채 그저 올라가서 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즉, ‘두 개의 문’이란 말단 특공대원들이 체험한 현장의 부조리함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특공대원 중 하나는 현장을 ‘생지옥’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목의 1차적인 의미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문’이란 참사를 보는 ‘시선’의 은유이기도 하다. 일단은 다섯 명의 희생자와 유족들의 시선으로 이 참사를 봐야 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명령을 받고는 생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던 특공대원들의 시선으로도 봐야 한다. 이 두 개의 시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두 개의 문’을 함께 열어야만 참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냐고 반문할 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 (경향신문DB)


특공대원 한 명을 죽인 것은 물론 현장의 철거민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철거민 다섯 명을 죽인 것도 현장의 특공대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희생자다. 가해자들은 그날 새벽 작전 명령이 떨어진 전화기 저편에 있었을 것이다. 이 여섯 명을 한꺼번에 죽인 범인은 ‘국가’라는 시스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국가’임을 자임하는 몇몇 인사들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력 진압을 강행한 지도부와 그 수장, 그리고 그들의 충성 대상이 된 정부와 그 핵심 권력자들이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명명하려면 ‘국가폭력’이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국가살인’이라는 용어를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용산참사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일 것이다. 참사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일상화되어 있다.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중 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버리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나. OECD 가입국 중 자살 1위인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40명씩 자살한다. 입시지옥 속에서 학생들은 자살하고, 정리해고와 가계부채로 40~50대는 자살하며, 극빈과 고독 속에서 노인들은 자살한다. 처음 한 명의 죽음은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부터는 ‘타살’이고, 수백 수천 번째가 되면 그것은 ‘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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