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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 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안도현(1961∼ )
△ 아버지 산소 둘레에 산목련 묘목을 심은 후 서비스처럼 뿌려둔 나팔꽃씨들, 지금쯤 한 꽃대마다 두세 개 꽃눈들 틔워 내고 있겠다. 이제 곧 한 소식 알리는 아침 나팔처럼 둥근 꽃잎들 피워 올리겠다. 하양도 좋고 보라도 좋고 분홍도 좋겠다. 아버지는 내게 땅이나 돈 대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름을 주셨고 근기(根基) 있는 두 발과 멀리 볼 수 있는 두 눈을 주셨다.
부를 대물림하기보다 아름다운 기부를 선택하는 부자들 얘기를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정문술 전 카이스트(KAIST) 이사장이 2001년 215억원에 이어 300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는 기사를 본 건 올해 초였다. 평소 “유산은 독(毒)이다”라고 생각했던 정 전 이사장은 기부 후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고 기부함으로써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돈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시를 나는 이렇게 바꿔 읽는다. “내게 돈이 있다면// 내 딸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돈이 들었다 난 자리에 생긴 굳은살과 고인 땀을 모아// 세상을 밝힐 든든한 힘과 지혜를 주리”. 돈에 대한 ‘으리으리’한 의리란 이런 것! 가을이 오면 까맣게 여문 나팔꽃씨를 받아두듯, 돈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의 씨앗을 받아두자.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틔워줄 씨앗들을 받아두자.
정끝별 | 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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