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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담당 기자로 일하던 1995년 섬뜩한 제목을 단 책이 나왔다. 기획출판모임 현실문화연구가 펴낸 <회사가면 죽는다>였다. 당시엔 ‘제목 장사’를 하려는 출판사들이 적지 않아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제목을 그리 정한 연유가 짐작됐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전사(戰士)들인 직장인들의 체험담을 담아낸 책은 다른 제목을 달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당시 세계화의 열풍 속에 개인에게 강제된 ‘경쟁력 강화’와 적자생존의 논리인 ‘자기 개발’이란 그물망에 걸려 있던 직장인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활자로 빼곡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들의 직종은 다양했다. 하지만 회사라는 ‘공룡’에 깔려 죽지 않으려는 ‘개미’들이 겪는 애환은 다르지 않았다.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 성차별 등에 시달렸던 필자들은 참을 수 없는 ‘을의 분노’를 가감없이 토해냈다.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줄 잘 서기’ ‘상사 잘 모시기’ 등과 같은 업무 외적인 요소로 승진이나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회사의 어두운 이면도 들춰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경영혁신이란 명목으로 앞다퉈 도입했던 ‘리엔지니어링’ ‘조직 슬림화’ 등이 직장인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곤 한목소리를 냈다. “회사가면 죽는다.”

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한국 사회 노동을 새로 쓰자’라는 주제로 민주노총이 주최한 ‘2018 세계노동절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책이 나온 지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직장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분노사회’ ‘감정노동 사회’ ‘피로사회’ ‘부품사회’로 만든 진원지는 다름 아닌 직장이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라는 허황된 논리는 직장 노동자를 기업주의 노예로, 갑질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간주하는 기업들의 행태는 20여년 전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있다. 그뿐 아니다. 나무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마른 잎새와도 같은 노동자들을 떨궈내려는 ‘경제적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출범 6개월을 맞은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최근 공개한 <갑질 사례집>에는 ‘노동 지옥’이나 다름없는 직장에서 일하는 ‘을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21세기판 <회사가면 죽는다>라고 할 만하다. 사장과 식사할 때 턱받이를 해줘야 하고, 회장 별장에 있는 닭과 개 사료를 주라는 지시를 받아야 하고, 사장 아들 결혼식에 불려나가 안내와 서빙을 해야 하는 곳은 직장이라고 할 수 없다. 갑의 횡포가 만연한 인권침해 현장이다. 사고를 낸 버스기사들의 목에 사고 내용과 피해액을 적은 종이를 걸게 하고, 생리휴가를 신청한 사원에게 ‘생리대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곳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경영진의 갑질 사례도 시즌제 드라마처럼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온다.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일삼은 제약회사 사장, 출입문을 닫았다고 경비원을 폭행한 피자업체 회장, 운전기사에게 ‘백미러를 접고 운전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설업체 부회장 등의 행태는 별난 개인의 예외적인 일탈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무릎 꿇려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는 비뚤어진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인격살인 행위다. 그런 대기업 경영진이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할 뿐이지 인격까지 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턱이 없다.

‘직장갑질 119’는 “부패하고 불의한 정권을 퇴진시킨 민주주의의 촛불은 회사 앞에선 꺼져 있다”고 했다.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적확한 진단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항공 직원들이 조양호 한진그룹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며 촛불을 든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직장 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을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주말마다 촛불집회를 여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갑질을 일삼고, 밀수·탈세 등 불법 행위를 저지른 총수 일가의 퇴진만을 위한 것은 아닐 터이다. ‘땅콩회항’ 사건의 피해자 박창진 사무장이 말한 대로 ‘사람이 먼저인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분노를 용기로 바꿨고, 용기를 실존하는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촛불집회 때면 외친다. “우리는 머슴이나 노예가 아니다” “썩은 곳이 있으면 도려내야 하고, 쓰레기통이 차면 버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일 노동절 메시지에서 “노동이 제도 또는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홀대받고 모욕받지 않는 세상을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처럼 갑의 횡포에 맞선 을의 연대와 저항이 있어야 가능하다. 노동존중 사회에선 ‘회사가면 죽는다’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국의 노동인권 시계는 아직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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