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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 선거가 끝난 뒤 조희연 당선자의 입에서 나온 일성(一聲)은 “제2의 고교평준화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한결같이 말한 것으로 보아 분명 준비된 멘트다.

그는 올해가 박정희 대통령이 평준화를 시행한 지 4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도 부연했다. ‘제2의 박정희 시대’를 추구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버지 업적을 계승하려 하니 어깃장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평준화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은 교육감에게 있지만 다른 지역도 아니고 서울에서 고입정책을 뒤집으려면 정부 협조가 필요한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1주일 뒤면 그는 교육 소통령이라 불리는 자리, 그중에서도 가장 막강하다는 서울의 교육감이 된다. 제2의 고교평준화 시대는 어떻게 오는 걸까.

먼저 개념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서울은 지금 평준화 지역인가, 아닌가. 전체 학생의 70%가 일반고에 배정된다는 점에서 평준화 지역으로 볼 수 있지만, 나머지 30%가 이런저런 경쟁방식에 의해 선발된다는 점에서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실질이다. 학부모들의 인식 속에 평준화는 오래전에 무너진 탑이다.

그렇다면 제2의 평준화란 무엇인가. 조 당선자는 자사고 폐지를 제2의 평준화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선거공약으로 자사고 폐지를 내걸었고, 당선 후에도 같은 취지의 말을 반복했다. 마침 5년 주기의 평가기간이 된 만큼 이번 기회에 정리할 자사고는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다른 평준화 구상은 밝힌 적이 없다. 만약 자사고 폐지가 전부라면 제2의 평준화는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사고가 평준화에 역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평준화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평준화의 가치는 자사고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모집 인원을 간신히 채울까 말까 하는 자사고 몇 곳을 지정 취소한다고 무너진 평준화 기반이 일어서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특수목적고, 그중에서도 외국어고에 있다. 외고가 평준화 붕괴의 주역이고 사교육 경쟁의 진원지라는 것은 이 땅에서 자식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외고가 명문대 입학의 지름길로 통하면서 외고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내려가 있다. 자사고 폐지의 명분이 입시위주 교육과 고교 서열화라고 한다면, 외고는 자사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4년 6월 6일


외고의 설립목적은 ‘외국어에 능숙한 인재 양성’이다. 하지만 이게 허울 좋은 명분이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외고를 나와 어학계열로 진학하는 비율은 30%가 채 안된다. 하지만 교육부나 대학에서 제재하기는커녕 반대로 내신특혜나 수능우대를 해줬다. 간혹 문제가 터지면 “설립목적에 위배될 경우 지정취소를 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지만 언제나 말뿐이다. 실제 지정취소를 내린 적은 없다. 설립목적을 무시하고 이과반을 편성해도, 시험문제지를 유출하는 부정을 저질러도, 불법 찬조금을 걷다가 적발돼도 큰 탈 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30년을 지나는 사이 외고는 평준화 이전의 명문고 이상 가는 엘리트 학교가 됐고 반대로 일반고는 갈수록 슬럼화해갔다.

자기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진보나 보수나 다를 게 없다. 진보교육을 자처하는 조 당선자나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의 아들이 외고 출신이라고 해서 약간의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한국의 파워 엘리트 중에서 자녀를 일반고에 보낸 사람은 눈 씻고 찾아야 할 정도로 드물다. 학생의 학력 수준은 물론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까지 모든 면에서 일반고와는 차원이 다른 집단, 그게 바로 지금의 외고다. 이런 외고를 그대로 두고 일반고 전성시대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전국 13곳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보다 더 역사적 의의가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정치혁명보다 중요한 교육혁명의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이런 사건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교육감에게 주어진 권한의 크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물어물하다가 도둑처럼 찾아온 제2의 평준화 기회를 바람처럼 날려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이종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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