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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책 한 권을 전해 받았다. <키움 수필집>(생각나눔). 이름만 봐서는 학급문고 같다. 편집과 디자인도 세련된 편은 아니다. 출간된 지 3주가 되도록 언론이 다루지 않은 걸 보면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지나칠 책은 아니다. 13명의 필자는 (사)국어문화운동본부(남영신 대표)가 운영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수요글벗’ 회원들이다. ‘키움’은 수요글벗 글쓰기 프로그램 가운데 기초과정인 ‘띄움’ 다음 단계인 심화반의 이름이다. 회원들은 국어학자인 남영신 대표의 지도로 매월 한차례 서울시청에 모여 써온 글을 발표하고 강평을 듣는 모임을 갖는다.

<키움 수필집>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들이 낸 생애 최초의 저작이다. 3년 남짓 글쓰기를 배운 뒤 처음 발표한 글들이지만 술술 잘 읽힌다. 눈에 띄는 것은 필자의 연령이다. 거개가 60대 이상이고 80을 넘긴 분들도 있다. 88세로 필자 가운데 최고령인 김창석옹은 ‘버킷 리스트’에 담아둔 ‘글쓰기’를 생의 마지막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고 조급해 하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인생이라는 깊은 샘에서 맑은 글을 길어올린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평신도 신앙활동 중에 만난 김수환 추기경의 인간적인 면모를 추억한다. 또 몇 해 전 떠나보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동양화 그리듯 아름답게 풀어낸다.

84세인 황민재옹의 글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전남 신안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 영문도 모른 채 형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2년간의 산중 생활을 하던 중 국군의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했다. 1953년 휴전협정 직후 석방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따돌림뿐이었다. 세상은 빨치산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여 그를 외면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와 ‘하얀나비’에서 젊은 날의 빨치산 체험과 장년 이후의 고단한 삶을 담아냈다. 원고지 30장 안팎의 짧은 글들이지만, 이를 확장시킨다면 장편 역사다큐가 만들어질지 모른다. 황옹은 글쓰기를 통해 가슴속에 묻어온 이야기를 발표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키움 수필집>의 필자들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오랫동안 글쓰기와 무관하게 살아왔던 은퇴자나 노인은 더욱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장·노년층 대상의 ‘수요글벗’을 이끌고 있는 남영신 대표는 글쓰기야말로 노인을 위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최대 자산은 자유와 경험이다. 좋은 글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나온다. 또 이야기가 동반될 때 좋은 글이 된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은퇴자와 노인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노인은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밀도 있는 문장을 쓸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노인력’으로 충분히 극복가능하다고 말한다. 노인력이란 통찰력이나 지혜, 유연함, 느림의 미학을 말한다.

일본인 쓰노 가이타로가 쓴 <100세까지의 독서술>이 있다. 작가와 주변 인물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70세 이후 100세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다. 일본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도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로 가고 있다. 은퇴 이후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수요글벗’ 회원들처럼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100세까지의 독서뿐 아니라 100세까지의 글쓰기도 생각해 볼 때다.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56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아간 유학자 미수 허목은 <미수기언> 93권을 남겼다. 이 중 상당수는 60~70대에 쓰였다. 88세를 산 허목은 86세에 장편 자서전 ‘자서(自序)’를 완성했고, 죽기 한 달 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00세를 눈앞에 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왕성한 글쓰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98세인 그는 올해 들어서만 3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00세의 글쓰기는 먼 이상이 아니다.

노년이 존중받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반면 노년의 지혜와 경험은 날이 갈수록 쌓이고 있다. 글쓰기는 ‘노인력’을 사회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좋은 방법이다. 나이 들어 글쓰기를 시작한 노인들은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곤 한다. 글쓰기란 자기의 삶을 그리는 기술이다. 노년층의 글쓰기가 서울 탑골공원의 노인들에게 확산됐으면 좋겠다. 탑골의 노인들 역시 모두 수십년의 사회경험을 가진 ‘노인력’의 소유자들이다. 많은 은퇴자와 노인들이 글쓰기를 통해 경험과 지혜를 동시대인들에게 전달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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