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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미래의 눈]다섯 개의 눈

opinionX 2018. 12. 13. 11:06

주소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뜨면 으레 원고 청탁이 새로 들어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청소년용 SF소설을 쓰시는 정현추 작가님 맞습니까?”

‘맞습니까?’라는 종결어미가 다소 불편했지만 그저 말버릇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렇다고 확인해주었다. 상대는 곧장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문화부 산하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 소속 최선민입니다. 작가님께 상의드릴 것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 처음 듣는 기관 이름이었지만 ‘교정’이란 단어가 즉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지금까지 펴냈던 책 여섯 권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이키며 출판사와 먼저 얘기해봤느냐고 물었다.

“저희가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상 출판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사후심의 절차 때문이라면 그게 맞습니다만, 저희는 다릅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최선민이라는 사람의 말을 꼼꼼히 복기해보았다. 사전심의제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요점을 말씀해주시죠.”

“작가님께서 내년 출판을 목표로 출판사와 함께 기획하고 계신 작품 때문입니다. 가제가 아마… <소행성의 아이들>이죠?”

팔에 소름이 돋았다. <소행성의 아이들>은 한 달 전에 계약한 이래 편집자와 함께 아직 틀을 잡아가고 있는, 세상에 선보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편집자와 나는,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늘 협업용 메신저를 통해 회의를 했다.

“저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폭력적인 쿠데타를 모의하는 이야기입니다. 소행성대에서 노동력과 지능을 착취당하며 광물을 캐는 주인공들이… 그중 한 명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작업용 기계를 개조해서 무기를 만들죠. 지금까지 결정된 줄거리는 이 폭력집단이 우주 자원관리청의 경비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고…”

“메신저 회의 내용을 도청했군요.”

“글 쓰는 분답지 않게 단어를 잘못 사용하시는군요. 도청은 법적인 용어도 아니고,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국회에서 통과한 실법령에 따르는 합법 감청입니다.”

작년인가, 선거 결과 보수 우파 성향을 자랑스럽게 내걸던 정당이 행정부와 국회를 전부 장악했을 때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우리는 유명한 디스토피아 작품들을 거론했다. 설마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텍스트 교정권고위원회라는 곳의 직원은 창작물의 내용을, 완성되기도 전에 사전 검열하고 지금처럼 연락해서 압박을 가하는 게 일입니까?”

“아닙니다. 합법 감청은 전적으로 인공지능이 맡습니다. 메신저 감청 인공지능에 따르면 정현추 작가님께서 앞으로 쓰실 글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 때문에 반정부 행위를 조장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원래 그런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 아닙니까. 청소년 소설의 주제가 반항인 것도 당연히…”

“저는 인공지능이 분석한 결과를 통보할 뿐입니다. 창작자의 견해를 밝히시려면 직접 방문하셔야 합니다. 전문가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휴대전화로 방문 일시를 안내하는 메시지가 갈 겁니다.”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미방문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이라는 글자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초당 수백만 건씩 오가는 메시지의 암호를 뚫고 모조리 감청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그 뒤에서 웃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호주 의회는 국가 기관이 IT 서비스 업체에 요청할 경우 업체가 메신저 전송 내용의 암호화를 풀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페이스북 메신저, 왓츠앱, 애플 메시지 앱 등은 어떤 식으로든 오가는 메시지 내용을 암호화해 전송한다. 도중에 가로채서 내용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송신과 수신이 이뤄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내용을 알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인터넷 통신 속 신뢰의 기본이다. 이는 사생활을 침해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와 직결된다.

하지만 호주 의회는 상하원을 막론하고 모두 이 권리에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찬성한 셈이다.

호주는 다섯 개의 눈 연맹(Five Eyes Alliance)의 일원이다. 이 연맹은 통신 신호 정보에 관해 상호 협조하는 첩보 동맹으로 호주 외에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가 참가국이다. 호주는 동맹국 가운데 처음으로 암호화를 해제할 수 있는 강제력을 명문화했다.

물론 그들도 내세우는 명분은 있다. 암호화된 메시지를 통신 수단으로 삼는 테러범을 사전에 검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전방위 감청을 허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악용될 소지가 너무나 많고, 그 허가 자체가 가지는 의미 또한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로 사회적 합의 과정을 생략해서는 안 될 문제다.

인터넷이 주요한 소통의 수단이 되어버린 지금, 어느 나라 누구든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는 없을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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