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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뭐 먹으러 갈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친구, 동료, 연인들이 가장 자주 내놓는 말이다. 뭘 즐기려 해도 막상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거리가 없어 결국 밥으로 화제가 모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단둘이 다니는 커플은 종목에 대한 의사결정 구조가 확실한 편이다. 하지만 여러 명이 참여하는 회식은 살펴야 할 눈이 많다. 연장자가 일방적으로 정하거나 그날 따라 유난히 ‘땡기는’ 메뉴를 주저 없이 외치는 사람도 없진 않으나, 한국 문화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대세’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함구하는 구성원들이 많다. 이리저리 배회하다 지치고 배고파지면 적당히 무난해 보이는 곳 앞에서 누군가가 제안한다. 그냥 여기 들어갈까? 드디어 결정에 도달한 기쁨에 모두들 아무 토 달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최대한 여러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음식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우리네 외식문화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할 것이다.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는 군단이 한꺼번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연회석을 갖춘 식당이 우리에겐 일반적이지만 서양에서는 찾기 힘들다. 인원이 많을수록 식탁의 반대쪽 끝에 위치한 사람끼리는 말 한마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같이 한 상에서 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취향과 식습관은 저마다 다르지만 오늘 함께 선정한 음식이라는 공통분모로 뭉치고 잠시나마 하나가 되는 사회적 기쁨을 누리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문화적 비교로 돌아가자면, 커피나 술 등의 음료로 미래의 만남을 기약하는 쪽이 서양이고, “언제 밥 한번 먹자”같이 식사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다. 심지어 언제 술 한잔 하자는 말로 대체한다 해도 그 속에 그득한 안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라는 표현이 맛에 대한 가장 극찬인 걸 보면 우리 사회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 만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함께 나가서 먹다 보면 생기는 문제가 또 있다. 모임의 집단적 의사결정과 왁자지껄 속에 묻혀버린 소신과 삶의 철학이 있다. 바로 철저하게 채식하는 사람, 유란채식을 하는 사람, 해산물까지만 먹는 사람, 고기를 먹더라도 최소화하고자 하는 사람 등 다양한 군상이 여기에 무더기로 숨어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라면 다양한 식단의 옵션이 식당에 기본적으로 구비돼 있고, 식습관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으로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웬걸, 실상은 전혀 딴판이다. 고기, 그것도 어떤 요리 속에서 일부분을 담당하는 고기가 아니라, 정말 고기 덩어리 자체만을 탐닉하는 고기. 하드코어 고기 식단의 일색이다. 이 식당, 저 식당, 옆 식당 모두 고기가 주메뉴이다 못해 외식업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채식은커녕 고기에 찌드는 것을 피해가기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거의 인구수만큼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치킨집과 온갖 다양한 고깃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보다 건강하고 친환경적인 식사를 할 최소한의 권리는 없다. 특히 여러 명이 즐기는 ‘잔치성’ 회식일수록 고기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분위기 흐리지 말고 잠자코 먹기나 할 일이다.

딴 거 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요즘은 전, 된장 또는 김치찌개, 만두, 볶음밥, 비빔밥, 빈대떡, 샐러드, 파스타 등 얼마든지 고기 없이 만들 수 있고 육류의 함유가 당연하지 않은 음식에도 대부분 고기가 들어간다. 심지어 야채김밥, 야채빵, 두부김치처럼 명확하게 채소로 된 이름의 음식마저 고기가 곁들여 나오기 일쑤다. 한마디로 ‘딴 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상추쌈만 씹어 먹는 것을 식사라고 우길 수는 없다. 채식하는 외국인을 대접하는 일은 거의 전투적 각오 또는 철저한 사전조사가 요구된다. 고깃집인지 모르고 채식 메뉴를 주문한 외국인에게 어느 식당 주인이 한 대답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기 시키면 야채 많이 줍니다!” 지나친 육류 소비의 문제를 떠나서, 여럿이 외식을 할 때 고기를 잔뜩 먹지 않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세계 식단을 조사한 결과 지난 50년간 한국의 곡물 섭취는 절반이 줄어든 반면 육류는 6배나 증가했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가구의 77%가 ‘외식=고기’로 여긴다고 한다. ‘고기 헤게모니’ 아래 삶의 다양성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선 채식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외국인들에게 듣곤 한다. 우리의 전통식단이 얼마나 야채를 잘 살리는지를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다. 살짝 데치는 나물무침, 시원하고 깔끔한 동치미, 온갖 종류의 두부요리, 풍부한 김치의 세계, 독특한 도토리묵, 장아찌, 무말랭이 등 무한한 반찬류, 비지찌개나 콩국수 등 헤아릴 수 없는 우리의 우수한 야채요리를 모르는 채 거리의 고깃집만 보며 이들은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슬기로운 채소 전문가에서 ‘고기 덕후’로 전락해버린 이 땅의 식문화에 반드시 다양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야생학교는 외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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