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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지하철 입구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지면과 시선이 점점 가까워오자 왼쪽 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녀석은 종종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동선은 느린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나의 궤적과 몇 초 후면 만나게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더럽고 징그럽다며 멸시당하는 불쌍한 비둘기를 놀라게 하기 싫었던 터라 나는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자동계단인지라 멈추지 못했고 비둘기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한 순간이 다가왔다. 휙. 해결책은 간단했다. 마지막 순간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비둘기는 ‘뒤로 돌아’ 동작을 신속하게 취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머쓱하게 그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양보하고 싶었는데.

하나의 공간을 두고 둘 이상의 생명체가 의도치 않게 ‘경쟁’하게 되는 이런 일은 너무도 흔해서 아예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도시에서 삶이란 서로 이리저리 피하면서 군상과 부대끼는 일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공간조차 힘들게 쟁취하고 지켜내야 하는 무엇이 된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겨우 서 있을 만한 한 뼘 남짓한 곳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안 해본 이는 없을 것이다. 우연히 같은 배를 탄 이들은 모두 각각의 자세와 점유 공간을 끝없이 미세 조정하며 도심 생태계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협조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는 차 한 대 때문에 구간 전체가 정체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간 센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공간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우발적 공간 경쟁을 매끄럽게 해결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구성원 각자의 민첩하고 섬세한 공간 감각이다.

비단 도심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수많은 생물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자연에서도 공간의 문제는 유효하다. 특히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에서 이 현상이 잘 나타난다. 정글의 식물들은 토양과 햇빛을 얻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그 결과로 수십미터 높이의 나무들에 의해 빽빽이 덮인 수관부가 형성된다. 나무 기둥 중간중간에는 착생식물이 어지럽게 붙어 자라 잎 사이로 새는 햇빛을 낚는다. 어쩌다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면 순식간에 생긴 정글의 구멍으로 쏟아지는 태양빛을 재료로 엄청난 식물의 생장 경주가 시작된다. 풍부한 식물들 사이에 사는 동물들도 공간에 예민하게 신경을 쓰며 밀림을 누빈다. 여기가 누군가의 영역은 아닌지 킁킁거리고, 보금자리에 딱 맞는 굴을 발견해도 일단 먼저 차지한 입주자가 없는지 조심스레 확인한다. 도시에 사는 우리처럼 야생동물들도 때로는 줄을 서기도 한다. 내가 연구를 했던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서는 랑구르 원숭이가 맛있는 과일을 먹기 위해 먼저 나무에 들어간 긴팔원숭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들어가곤 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걸려 안절부절못하는 것까지 우리네와 닮았다.


수상(樹上)생활을 하는 긴팔원숭이는 한 마리가 앉으면 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나뭇가지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유달리 공간 감각이 좋다. 놀고 쉬고 털 고르면서 서로 건너뛰고 올라가고 넘어가고 하는 게 가관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좁은 공간에서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보인다. 위로 넘어가도록 살짝 숙여주고, 지나가도록 옆으로 몸을 바짝 붙인다. 동물들에게도 공간 센스는 삶의 일부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공간은 점점 더 희귀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럴수록 공간 센스는 더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의 출현이 도심 생태계에 정체와 혼란을 빚고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이어폰으로 틀어막은 귀와 화면에 고정된 눈, 현대인의 감각기관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 앞뒤 좌우 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전혀 살피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공간의 부족을 완화시키기 위한 일말의 동작도 하지 않는다. 걸을 때조차 눈을 뗄 수 없는 스마트폰 때문에 진행은 느리고 바쁜 사람은 뒤에서 발을 구른다. 내가 내 전화기 보겠다는데 무슨 죄인가? 혹자는 반문한다. 공간 센스를 발휘하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죄이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밀집된 곳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개인 각자의 미세한 공간 조정이라는 현대인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격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속으로 나의 감각기관을 폐쇄시킨다는 것은, 공공장소에서 거동이 불편한 자, 짐을 많이 든 사람, 시간이 부족한 누군가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물리적 실체를 갖는 것이며 공간을 점유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점유는 일시적이며 잠시의 차지에 대한 겸손한 자세와 긴밀한 협력 의지가 없는 이상 공간은 서식지가 아닌 격전지로 전락된다. 단순히 모여 있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한 기본적 덕목인 공간 센스, 야생학교는 권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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