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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그랬는데요.

학창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뭔가를 잘못하다가 걸려서 선생님께 불려 나갈 때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던 변명이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의 옵션이 많지는 않다. 대충 둘러대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핵심 내용은 몰라서였다는 것이 된다. 만약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조금이라도 알면서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간 큰일이다. 그것만큼 뻔뻔스럽고 반항적이고 틀려먹은 자세가 또 있을까!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는 지름길일 뿐이다. 반드시 무지한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어야만 좀 혼나더라도 넘어갈 수가 있다. 몰랐다고? 그래, 그럼 다음부터 잘해. 가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잘못을 자랑이라도 하듯 너무 당당한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실은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다. 설사 안 좋은 일이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오히려 개선의 씨앗이 된다. 적어도 판단력은 똑바로 박혀 있으니 다음에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지함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너무 용인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일을 엉망으로 해놓고서도 무엇을 저질렀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특히 그것이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국가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가령 수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도로명 주소 사업은 우리의 주소 체계를 뒤바꾸어 놨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동(洞)’이 없어지고 대신 도로명이 생겨난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과 도로는 전혀 위상이 달라, 동이 제거된 신(新)주소에는 정작 필요로 하는 지리정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도로명은 극히 자세한 수준에서 길 찾기에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로 의사소통하는 지리적 단위는 도로보다 더 넓은 공간적 범위를 가리킨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을 때 ‘구(區)’라고 답하기는 너무 넓고, 도로명을 말하기에는 너무 자세하다. 그 중간의 단위인 동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지리적 ‘해상도’에 해당되는 지리적 단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소체계가 바뀐 후에도 동은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옛 주소를 고집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동(洞)은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수원(水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생태학적 유역 개념이 반영된 말이다.



동네 이름의 사회문화적 탄생과정을 무시하고 몇몇의 실무자들이 자의적으로 지은 새 도로명보다 훨씬 의미가 있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주소는 가장 자주 쓰이는 단위만 달랑 빠진 채 주소의 사회문화적 체제와 합치되지 못한 상태로 둘 다 어정쩡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러고도 정부는 이를 어엿한 사업이라 부르며 뭔가를 했다고 여기고 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지조차 못한다.

지난해 말 파리 기후변화총회에서 우리 정부는 배출전망치 대비 온실가스 감축을 37% 선으로 정한 공약을 제출하였다. 이는 제출 전 30% 이하로 얘기되었던 것보다는 높은 편이었지만 네 개의 연구기관이 모여 만든 국제 기후분석 사이트인 ‘Climate Action Tracker(CAT)’는 이에 대해 ‘부적절(inadequate)’ 판정을 내렸다. 만약 다른 국가들도 한국 감축안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행동한다면 지구 기온을 2100년에 3~4도 상승시키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 온도상승이면 이미 지구는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미 CAT는 최종안 이전에 제시된 안 네 가지 모두에 대해서도 같은 등급을 내린 바 있다. 게다가 이 부적절한 최종 감축안마저 법적 강제력에 의한 실질적인 국내 배출량 감축보다 국제탄소시장의 거래를 통한 감축에 큰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국내 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두 배(1990년 대비) 증가시키는 것이 된다고 한다.

한 마디로 한국이 내놓은 감축안은 국제사회의 목표치인 섭씨 2도 이내 온도상승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의 새 수장으로 선출된 이회성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고립된 나라도 아닌데 책임 있는 사람조차도 기후변화체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세계에서 현재 일곱번째로 많은 탄소배출량으로 기후변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나라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북극의 기온 상승에 따라 극지방의 찬 소용돌이 기류인 ‘폴라 보텍스(Polar vortex)’가 느려지면서 최강 한파를 맞아 고생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에도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무책임한 변명을 둘러댈 것인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데이터의 왕국을 자처하는 이 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야생학교는 흔든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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