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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재 | 언론인


뻔뻔한 세상이다. 법을 어긴 청와대는 모르쇠로 잡아뗀다. 수사에 나선 검찰은 장님이 되어 면죄부만 날린다. 사회의 목탁을 자처하는 언론은 갑자기 벙어리로 돌변해 침묵한다.

‘민간인 불법 사찰’ ‘내곡동 사저 터 헐값 매입’ ‘BBK 가짜 편지’ 등 사건들은 모두 중대한 범죄행위다. 이들 사건은 한결같이 이명박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정황이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지닌 검찰과 언론 덕분에 세상은 평온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태평하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서 무서운 독버섯이 피어나고 있다. ‘불의에 대한 불감증’이 그것이다.

바야흐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야만 사회가 열리고 있다. 염치없는 세상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염치 아닌가. 무릇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 부끄러워하는 게 도리다. 옛 선비들은 오죽했으면 ‘오얏나무 밑에선 갓 끈도 고쳐 매지 말고, 참외밭을 지날 땐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했겠는가. 부끄러운 짓에 대한 선비들의 고결한 숨결이 느껴진다.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삼갔고, 적어도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을 땐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염치만은 지녔었다.

그 염치는 시공을 초월하는 인류의 보편적 속성이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뻔뻔한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불문율이기도 하다. 염치는 함께 사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양심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불법사찰·내곡동 사저·BBK…
MB시대가 낳은 불의에의 불감증
보수도 진보도 고개 돌릴 죄악
정녕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MB시대를 가름하는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염치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그것은 범법 그 자체보다 무서운 일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권부의 범죄, 이를 마치 방조하듯 눈감아주는 검찰, 침묵하는 언론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삼각편대다. 어느 한쪽이라도 ‘빈대의 낯짝’을 지녔다면 염치없는 사회적 기풍이 뿌리내릴 수 없을 터.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순간 하늘을 나는 환희와 함께 느꼈을 무거운 책임감을 아직 지니고 있는지 묻고 싶다. 취임식 선서를 떠올릴 때, 정녕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한때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노무현 시절 법무장관과의 집단 모임에서 보인 ‘당당한 언동’에서 표리부동한 검찰의 속성을 꿰뚫어 본 절묘한 표현이었다. 권력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고 힘없는 서민 앞에선 저승사자인 검찰이다.

권력의 손아귀에 장악된 언론의 몰염치도 도를 넘었다. 언론의 길을 포기하는 대신 권력에 충성하는 방송을 참다못해 들고 일어선 저항에 반성은커녕 징계와 인사권의 칼을 휘두르는 ‘낙하산’ 지휘부의 폭압은 군부독재 시절을 그대로 빼닮았다. 언론의 침묵은 무기력한 사회적 기풍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 죄가 크다.

‘부끄러움에 대한 불감증’은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4대강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일부 학자들은 전문성을 앞세워 사업의 정당성을 강변한 바 있다. 최근 방송사 파업 과정에서도 ‘퇴출 대상자들’이 전혀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은 과거 독재 시절 어용 언론인들을 오히려 능가할 정도다. 시청자가, 젊은 언론인들이 어찌 평가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비친다.

100일을 훌쩍 넘긴, 공중파 방송의 장기파업 사태는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건만 시청자들이 무덤덤하다니, 참으로 기이하다. 뉴스 시간이 잘리고, 그 내용이 부실해도 사회적 저항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헐렁해진 뉴스보다는 <무한도전>에 대한 아쉬움의 소리만 높다. 회사 쪽은 그 무관심을 방패삼아 버티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무관심은 미디어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닌 터다. 무관심은 언론으로서 방송에 대한 기대를 시청자들이 이미 포기했다는 징표로 읽힌다. 이는 또한 불의에 대한 불감증이 사회적으로 상당히 진행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무서운 ‘불감증’이 초래할 2차 독성이 더욱 걱정된다. 염치가 사라지면 작은 이익을 좇는 밀림의 법칙이 기승을 부릴 터. 도덕과 정의의 언덕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급기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온갖 힘에 의존하는 ‘비겁의 물결’이 사회를 덮칠 수밖에 없다.

염치가 사라진다면 진취적 기상도 사라질 수밖에. 미래의 꿈 대신 오늘의 알량한 이익을 추구할 따름이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갇힐 때,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겠는가. 상상력이 메마른 황량한 사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인간의 상상력, 창조적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도전받는 경제체제, 화석에너지의 고갈, 디지털 시대 인간관계의 혼란 등 오늘 인간이 부닥치는 세기적 위기의 격랑을 헤쳐 나갈 지혜의 보고, 인간 상상력의 날갯짓은 둔해질 것이다.

교육은 또 누가 시키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사회가 곧 교육의 현장이다. 사회 기풍은 누가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그대로 옮겨진다. 거짓이 용납되는 세상이라면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거짓을 말하고 행동하게 마련이다. 불의가 용납되지 않은 세상이라면 아이들도 스스로 무엇이 정의인가를 생각하듯.

청와대는 아이들에게도 익숙한 교육의 마당이다. 간접적이지만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가장 자주 만나는 익숙한 교실이자 교사인 터다. 사회 기풍을 어지럽히는 문제의 진원지, 청와대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되찾기를 기대한다. 거짓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염치없는 범법행위를 어른들이 저지르면서도,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생, 도리를 배우라고 기대하는 것은 숲에서 생선을 구하는 꼴이다.

정권과 정책에 대한 평가가 보수·진보 진영에 따라 엇갈리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부패·비리에 정치적 견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명백한 불법에 진보가 어디 있고 보수가 어디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염치마저 사라진 세상이라면 ‘패륜 사회’다. 염치는 건강한 사회를 떠받드는 최소한의 도리인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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