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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공학 고등학교 1학년 학생 7명이 학습동아리 ‘탁상공론’(卓上共論)을 만들어 우리 고전을 번역해 보고자 했다 한다. 이들은 <역사스페셜> 등 관련 TV 다큐멘터리를 섭렵하고 ‘승정원일기’를 소개한 대중교양서 <후설>(喉舌)도 읽어보았다 했다. 신통방통한 녀석들이다.

지도교사가 한국고전번역원에 견학과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느냐는 전화를 했다. 불감청고소원. 원장님께 질문지를 미리 보내왔다. 조선시대 기록문화가 발달한 이유, 고전번역원의 역할, 고전 번역가가 되려면, 고전 공부의 비결, 구결(口訣)의 원리 등이었다. 고전번역교육원 홈페이지의 논어(論語) 동영상을 보면서, 학민출판사 발간 영인본을 복사해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번역을 해본다는 것이다. 수백 장의 한자카드 묶음도 보여줬다.

번역팀장에게 보낸 질문지는 점입가경. 이 사료의 신뢰도와 위상은 어느 정도이며 완역되면 역사학계와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왕에 의해 삭제된 부분은 얼마나 되는지, 고전 번역가의 직업병이나 재미난 에피소드는 있는지 등이었다.

번역 현장을 어깨너머로 본 이들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원장님은 즉석에서 구결표를 손수 써주며 격려했고, 대외협력실은 <논어강설>과 메일링서비스인 ‘고전산책’을 보내주기로 했다. 다음날 회장 학생이 원장께 보낸 장문의 문자가 더욱 감동적이었다. “번역원의 친절에 감동받아 지금도 그 여운이 다 가시지 않을 정도예요.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또다시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겨울 들머리에 ‘성균관’에 대한 해설 겸 특강을 했다. 강의가 끝난 후 한 여학생이 다가와 대뜸 물었다. “승정원일기는 얼마나 번역이 됐나요?” 헐? “승정원일기를 알아?” “예. 인조 때부터 순종 때까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에서 쓴 일기잖아요.”

초서로 쓰인 승정원일기 원본 (출처 : 경향DB)


강연 머리에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을 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에 다닌다고 했더니, 그게 궁금했나 보다. “역사에 관심이 많네.” “예. 나중에 사학자가 될래요.” “그럴려면 한문을 많이 알아야 해. 급수시험은 봤어?” “곧 볼 거예요.” “역사책도 많이 읽었겠네?” “그런 편이에요. ‘만화로 본 실록’도 다 읽었어요.” “대단한데.” “전주이가 ○○공파 △△대손. 고창중학교 2학년인데, 김포향교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어요.”

극히 일부겠지만, 고전의 가치를 아는 학생들을 보면서 불쑥 든 생각이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였다. 이들은 수년 내에 역사학자나 고전 번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흔히 고전(古典)을 ‘내일로 가는 옛길’이라고 한다. 한문(漢文)으로 쓰여진 수많은 고전을 살아 숨쉬는 우리글로 깨워 ‘눈 밝은’ 이들을 내일로 가는 옛길로 이끌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더욱 느꼈다.


최영록 | 한국고전번역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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