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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모이는 추석연휴에, <노인과 바다>를 읽기 시작한 것은 나로서도 뜬금없는 일이었다.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쿠바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 앞바다를 헤엄쳐 다닌다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청새치를, 하다못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조차 본 일이 없다. 수십년 전 소년소녀 세계명작선집에서 <노인과 바다>를 읽었고,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은?’ ‘인간 불굴의 의지’라는 판에 박힌 문답식 교육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추석 명절의 노동을 ‘인간 불굴의 의지’로 견디기 위해 <노인과 바다>를 펼쳐들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는 어쩌면 노인의 ‘홀로 있음’이 필요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소설의 첫 두 문장을 읽은 뒤,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헤밍웨이가 삶에 대해 말하려던 것은 여기 이 두 문장에 다 들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거대한 고기를 사투를 벌여 잡았고, 그 고기를 다시 상어떼에 다 빼앗겨 앙상하게 뼈만 남겨 돌아오는 이야기는, 노인이 소설의 마지막에 자기 자신에게 외치듯이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열두서너 살쯤의 나였더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문장과 단어, 상황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 세웠기에, 덮어두었다가 다시 펴서 읽기를 반복하느라 짧은 분량의 소설을 읽는 데 연휴를 훌쩍 넘겨 버렸다.

일을 위한 독서를 꾸준히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이 허기져 바닥까지 박박 긁어도 더 이상 내 안에서 퍼낼 것이 없다고 느낄 때, 내가 찾아갈 곳은 두 손 펼칠 공간만큼만 있으면 되는 책이다. 지상의 어느 날이 너무 아득할 때는 <코스모스>를 펼쳐본다. 우주를 바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그것도 이제야 발목을 물에 적신 수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다정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사실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일 뿐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라는 것. 그러니 심연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고.   

2018년 책의해를 맞아 독자개발 연구를 해오고 있는 2018 책의해 조직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주 ‘읽는 사람, 읽지 않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중간결과 발표회를 가졌다. 이순영 고려대 교수팀이 설문조사와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통해 연구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1200명) 중 23%는 ‘일 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답했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인터넷으로 찾으면 원하는 정보를 바로 그 부분만 빠르게 찾을 수 있으니까’였다. 

맞는 말이다. 책은 원하는 정보를 입맛에 맞게 즉시 내주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쌀 한 줌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기에 도서관 하나 분량의 정보를 저장해 다닐 수 있다 해도, 우리의 사유는 클릭으로 불러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피부 아래에 있던 것들이 숨 쉬듯 토해져 나오는 것이다. 내 마음의 근육에 부지불식간에 밑줄 그어진 문장들이 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예술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IT든, 처세술이든 책은 결국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는 두텁고 매혹적이며 웅숭깊고, 어떤 이야기는 얄팍하고 시시하며 겉발림이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든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그것은 결국 내게로 돌아오는 길이 된다. 여행의 전과 후의 나는 같지 않다.

“거대한 바다, 그곳에는 우리의 친구도 있고 적도 있지”라고 노인은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채팅창의 친구들이, 술자리의 벗들이, 때론 영화와 드라마의 대사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듯이 책 속의 이야기꾼들도 내 마음을 그들의 방식으로 다독여준다. 그 이야기는 힘이 세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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