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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에서는 주로 내가 느끼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마치 제3자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필자라는 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평생 자동차라곤 사본 적도 없고 사실 운전도 하지 않던 내가 최근 자동차를 보러 다녔다. 그것도 이른바 외제차를 보고 다녔다. 훈데르트바서는 ‘집’을 제3의 피부(옷이 제2의 피부)라고 하면서 자기답게 꾸밀 권리, 창문이나마 자기 스타일대로 만들 수 있는 ‘창문권’이라고 한 바 있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에게 자동차도 또 다른 피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차는 내게 삶의 공간으로서 아름다웠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전기 차에 대한 바람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함). 그런데 예상외로 대부분의 외제차종의 색깔 선택지란 흰색(아이보리), 은색, 회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꽤 잔혹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아마도 더 ‘고급진’ 라인의 자동차라면 선택지가 넓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외제차의 본사가 있는 자국과 미국이나 일본에 수출되고 있는 동종 차들을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의 차가 제공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구매시장이 크지 않아서다.

이상한 것은, 어떤 종류의 수입차들은 인기가 좋아서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주문생산’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주문생산이란 고객의 요청을 받아서 생산한다는 것인데 짧으면 3개월, 길면 거의 1년까지 기다려야 주문 차를 받게 된다. 이렇게 충직한 고객들에게 그리 특별한 요청도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다양한 색깔의 차들을 수출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업무를 수반하는 것일지 의문이다. 게다가 외국에 비해 동종 차의 가격이 한국에서는 의미있게 비싸다. 그것은 세금 및 판매수수료 등에 기인할 것이고 국내 자동차 생산에 대한 보호 장치라고 맞설 수 있으므로, 외국회사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닌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국내차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으로 보호받고, 외국차는 비싼 가격을 보장받는 셈이다. 반면 한국 소비자들의 입장에선 더 비싼 가격에 더 좁은 선택지의 외제차를 구입해온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개별 소비자 선택권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인 내지 아시아인의 취향에 대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거다. 내가 만난 판매직원들은 한결같이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 말했고 그것을 권해 주었다. 그것은 흰색과 검은색의 이분법적 색깔 세상의 몇 가지 조합이었다. 심지어 그 몇 색깔 중 여성들이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도 안내해 주었다. 내게는 이 무채색 스펙트럼 자체가 매우 남성적인 것임에도. 왜 한국인들이 그런 색깔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먼저, 무채색으로 가득한 우리의 자동차 거리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고, 둘째, 한국인들은 ‘튀는 색깔’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 중고시장에 내놓으려면 무난한 색깔이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어반복적 설명. 나는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한국인이 아니던가. 그보다는, 한국인들은 그런 정도의 색깔이라도 큰 불평 없이 자기네 차를 구매할 것이라는 외부의, 그리고 한국인 내부의 시선이 있는 게 아닐까. 색채에도 인종과 성별의 정치경제학이 있는 듯하다.

칸딘스키가 색채가 정신성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고 색으로 관객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말에 공감한다. 색채로 영혼을 표현하고 영혼을 저격할 수 있다고나 할까. 마음치료에 색깔치료라는 게 있다. 색깔로 마음과 몸의 부족함을 채우고 자기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한 색깔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무지개처럼 풍요로운 색채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빨강이라고 다 그냥 빨강이 아니고 파랑이라고 다 그냥 파랑이 아니다. 장밋빛 빨강과 노을빛 빨강이 있고 와인빛 빨강과 아기의 입술색 빨강이 있다. 가을 들녁 갈대의 베이지가 있는가 하면, 봄빛 아래 새잎이 돋을 때 잠시 스쳐가는 연둣빛 베이지가 있다. 도시의 무채색 세상에서 자라난 우리들, 거리표지판 하나라도 고민하고 실험하여 정성스레 만들어진 색채 속에서 살지 못한 우리들, 조상들이 사용했던 염료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멋진 색채로써 나를 즐겁게 하고 다른 이를 유혹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오늘날 패션, 인테리어, 가전제품 등 거의 모든 상품이 디자인과 색채 전쟁이 아니던가.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자동차 색깔을 무채색의 네 가지로 말하는 건 심히 우울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내 친구들, 그리고 미적 감각이 넘쳐나는 미래 세대들에게 더 이상 그런 강요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모방은 언제나 ‘B급’에 머무니, 디자인과 색채 수재들에게 투자해 한국 차도 색채와 디자인을 새롭게 창조했으면 한다. 한국인의 취향은 이미 한국의 틀을 넘어섰으므로.

<양현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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