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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상경한 금요일, 늦은 오후였다. 을지로 빌딩가의 한 카페에서 우유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논문을 수정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앉았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얼핏 보아도 사회초년생 티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어려 보인다’ 혹은 ‘실제 어리다’와는 결이 조금 다른, 풋것의 느낌. 창밖을 보며 나란히 앉도록 설계된 자리인데 굳이 옆사람을 의식했던 이유는 그녀가 커피를 받아오자마자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공장소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만큼 마음을 다친 것일까 했다. 아무리 생면부지라지만 울고 있는 사람 곁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핥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내려뜨린 채 교정지 페이지만 타닥타닥 넘겼다.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그녀는 이윽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부장님 혹시… 죄송하지만요. 죄송한데 바꿔주시면… 그러면 팀장님은 퇴근… 예? 아니,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듣게 되었다. 애써 귀를 닫으려 해도 안되었다. 얕은 호기심인 줄 알지만 궁금함이 일었다. 무슨 일일까. <미생>과 같은 비정규직의 아픔일까, 아니면 직장상사에게 모진 말을 들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사무실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거나 모종의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까.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이런저런 추정을 해보았다. 어느덧 옆자리에서는 어깨의 들먹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내더니 메이크업 도구들을 집었다.

먼저 눈가에 섀도를 덧바른 후 연필처럼 생긴 것으로 세심하게 선을 그려 넣었다. 퍼프로 두 뺨을 팡팡 두드리고 입술에 다시 색을 입혔다. 방금 울었던 사람이 맞나 싶도록 집중해서 말이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나는 우연히 보았다. 수정작업을 하다 말고 그녀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주 잠깐, 표정을 연습하듯 생긋 웃어보는 것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흐느끼던 얼굴을 볼 때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종래의 호기심이 연민으로, 연민은 이내 동질감으로 옮겨갔다. 눈화장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고 손거울도 갖고 다니지 않으면서 왜였을까. 그녀에게 불가해한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이다. 

어느 소설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눈물진 눈가를 정리하러 간 여자친구가 거울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약간 벌린 채 마스카라를 칠하”는 장면을 주인공이 문틈으로 보게 된다. 숙련된 장인처럼 그 일에 몰두하는 표정이 마치 “조금 전까지의 눈물과 애교, 토라짐이 하나의 연기였음을 조용히 웅변하는” 듯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언제 울었냐는 듯 단장에 열중하는 모습에 조용히 소름이 돋았다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쓴웃음을 짓게 했다. 웃음의 뒤끝은 씁쓸하기보다 슬펐다. 작중 인물을 대신해서 항변하고 싶었다. “화장 고치는 데에 몰입했다고 그전의 감정들이 연기였다 할 수 있나요?”라고. 마음이 깨진 상태로도 불특정 다수에게 예쁘게 보이고픈 강박이 그녀 역시 싫었을 거라고. 부서진 마음을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글을 쓰고, 어떤 일이든 부탁받으면 기꺼이 응하는 스스로의 강박이 그악스럽게 여겨졌던, 그래서 한밤에 깨어나 토했던 나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작가와 같은 시선으로 사람에 대해 냉소할 수 없었다.

화장을 안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직업을 가진 내가 말쑥한 차림새의 직장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일터를 가진 이에게 함부로 공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안될 것 같다. 그저 나는 꾸역꾸역 단장하던 그녀에게서 꾸역꾸역 성실하고 상냥했던 스스로가 겹쳐보였을 뿐이니까. 손거울을 보며 웃어놓고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다시 울 사람에게, 그래서 일순간 동류의식을 느꼈을 따름이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고인 눈물이 마르고 나면 이내 휘발될 피상적인 감상이었다.

그럼에도 종종 그날이 떠오른다. 당시 그녀를 괴롭혔던 대상이 직장업무였든 부장님이었든 사회구조 자체였든, 지금은 그녀가 덜 힘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스럽던 순간들, 스스로의 강박 어린 생존본능을 미워한 그 시간들마저 타인의 아픔에 밀알만 한 크기의 쓰임새를 갖는 셈이다. 이 또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엇이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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