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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을 앞두고 설렘을 맛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당신은 낯설수록 쾌감을 느끼는 모험가여야 한다. 가는 길의 산과 물이 설수록 모험가는 짜릿함을 느낀다. 모험 그 자체를 즐기지 않는 조심성이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낯선 길이 일확천금을 기대할 수 있는 엘도라도로 우리를 안내한다면 떠나기 전날 잠을 설쳐도 어색하지 않다. 황금은 아니어도 영혼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면 떠나는 길에 기대를 걸 수도 있다. 누구라도 한번쯤 버킷 리스트에 올려 놓았을 듯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나 라사로 가는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날, 그 어떤 바람 때문에 밤새 뒤척일 수 있다.

인생이란 시간이라는 길을 걷는 여행과도 같다고 비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길을 빨리 걷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떡국 한 그릇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나이 한 살 얼른 더 먹고 싶어 떡국을 두 그릇이나 먹겠다고 칭얼대기도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랬던 사람도 어느새 생일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의 개수를 신경쓴다. 모두가 칭송하는 젊음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수록 맞이한 생일날 우리는 마냥 기쁘지 않다.  

늙어가는 길, 누구에게나 초행길이다.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은 많으나, 정작 그 길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한 사람조차도 어서 오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러니 늙음으로 향한 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곳에 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늙는 게 두려운 사람에게 노인들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지를 알려주는 메아리가 수시로 들린다. 메아리는 말한다. 노인의 세계에서 고독사는 다반사이며, 그들 중 일부는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고 있는데 폐지 줍는 노인의 74.5%가 76세 이상이며 이들의 한 달 수입은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노인은 공짜 지하철을 타고 할 일 없이 서울에서 천안까지를 왕복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노인은 교회가 나줘주는 용돈 500원을 받겠다고 줄을 서 있다고 한다.

메아리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노인자살률의 원인이 늙음이 아니라 그 역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노인빈곤율임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빚어내는 재앙을 ‘늙음’에 대한 공포로 슬쩍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 자금이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당연 그 자금이 안티에이징이라는 마법을 발휘할 것이라는 꼬드김도 잊지 않고 전해준다. 안티에이징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면 노인은 안티에이징에 실패한 사람에 불과하다.

늙음이 꼰대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한,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늙지 않는 것뿐이다. 늙음 그 자체가 차별적 농담이 되고,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세상이 가득 찰수록 늙어감에 대한 공포는 커진다. “세월을 비켜간 외모” “40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비결” “나이를 잊은 듯한 당당함” “여전한 활력”과 같은 예찬은 노년공포증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100세시대, 즉 호모헌드레드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유엔이 선포했어도 노년공포증과 연령차별주의적 농담은 무성히 퍼져나가고만 있다. 누구나 늙음을 조롱하고, 늙은 사람을 가엽게 여긴다.

한 젊은 사진작가가 있다.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젊었기에 그 역시 늙는 게 두려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직 노인이 아니기에 노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담고 있는 노년공포증을 그 역시 갖고 있었다. 그 사람은 “늙어가는 과정이란 지쳐버린 배우가 무대 뒤로 물러나다가 마침내 발을 헛디디는 것처럼, 어둠 속으로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것”이라 상상했었다. 그 젊은 사진작가는 이스트런던에서 86년 넘게 산 노인 조지프 마코비치와 함께 이스트런던 거리를 다니며 노인의 일상을 기록했고 그에게 인생에 대해 물었다. 이미 늙은 조지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답했다.

“세상일에 울어봤자 소용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슬퍼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요. 가장 좋은 건 그냥 계속 걷는 겁니다.”(<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1/2년을 살았다> 중)

머무르고 싶어도 머물 수 없다면, 가는 세월 막을 수 없으니 그냥 계속 걷는 것 이외에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늙음은 죄가 없다. 노인빈곤은 정책으로 해결하면 된다. 늙으면 모든 게 나빠질 것이라 겁을 먹고 있다면 매일 늙어가는 우리조차 어느새 연령차별주의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늙으면서 나빠지지만 모든 사람이 늙었기에 추해지지는 않는다. 늙음은 추함의 원인일 수 없다. 추한 노인도 있지만 ‘괜찮은 노인’도 있다. ‘괜찮은 노인’은 여전히 젊은 노인, 세월이 비켜간 얼굴을 갖고 있는 노인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온 과거이며, 늙음은 현재이다. ‘괜찮은 노인’이 되는 것은 미래의 문제이다. ‘괜찮은 노인’이 되려면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게 아니라 그냥 계속 걸어야 한다. 이스트런던의 조지프처럼. 우리는 계속 걸을 테니, 국가는 노인빈곤을 해결하라고 외치면서.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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