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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다니는 학교 복장규정을 새로 정하는 데 학부모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교복 길이, 덧입는 옷의 종류, 화장과 머리 모양,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정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참석 여부와 상관없이 의견을 설문으로 제시할 수도 있었으나 사전 논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설문에 반영될 거라서 나는 참석을 택했다. 개선하고 싶은 안이 있었고, 복장과 두발의 자율이라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각각 어떤 입장인지도 궁금했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학생다움’을 강조해 보수적인 결정을 유도하면 적극적으로 아이들 편에 서야지 홀로 투사인 척 그런 오지랖 넓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학교가 보수적일 거라는 건 나의 편견이었다. 특히 교사들의 의견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 세 그룹 중 가장 파격적이었다. 안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원하는 어떤 방향도 동의했다. 어떤 안은 교사들이 낸 것이 가장 파격적이었다. 그렇게 입장이 정해지기까지를 설명하는 교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까지 교사로서 자신들이 지도해 온 ‘학생다움’이 복장과 외모, 태도가 아니었나 생각했다는 것, 그리하여 처음부터 학생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교사에게는 또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해보았다면서 학생에게 학생다움이란 수업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교사에게 교사다움이란 그 수업을 준비하고 도와주는 것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꺼내놓지도 못한 오해를 삼키며 부끄러웠는데, 한편으로 신선한 감동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치마 길이와 명찰, 머리 길이로 인한 체벌이 하루를 시작하는 교육이었던 나는,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밝은 미래를 엿본 기분이었다.
학생들의 입장은 다소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학급 내의 토의를 거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기성세대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지나침을 배제하려는 어떤 기준이 있었다. 무릎 아래 치렁치렁 늘어진 치마도 싫지만 다리 전체가 훤히 드러나는 치마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고, 화장은 하고 싶지만 입술과 피부 정도의 가벼운 화장만 허용하는 게 맞는 거 같고, 액세서리는 나쁠 것 없지만 안전을 위해서 목걸이나 늘어뜨리는 귀걸이는 안될 것 같다고 하고, 실내화는 귀찮지만 청소할 때를 생각하면 구분해서 신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풀어놓는다고 지구 반대편으로 겁 없이 달려 나갈 아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기특하고,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중도의 보수성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궁금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테두리를 검토하고 정해나가려는 자의 자정능력이라면 바람직하지만, 안전한 곳만 골라 디디며 살도록 훈련받은 자의 내성이라면 조금 쓸쓸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자인지 후자인지는 아이들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일. 그래도 토론이라는 과정을 거쳤으니 세상의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인지했을 테고, 그 과정을 통해 조금 넓어진 테두리에서 살다 보면 스스로가 결정한 삶을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깨닫게 되겠지 기대해볼 뿐이다.
복장 규정 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현재의 교육제도 개정에 대해서도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사고 존립 논쟁도, 수시와 정시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자유학년제와 진로탐색체험에 대해서도 각각의 교사 단체와 각각의 학부모 단체만 첨예하게 옳고 그름을 논할 뿐, 지금 그 교육 과정을 겪어내는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불합리한지, 무엇이 부당한지, 어떤 방향을 바라는지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교육에 대한 권리가 복장에 대한 권리만 못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만약 묻는다면 이 아이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도 궁금하다. 학생 50% 이상의 의견이 나오면 교사, 학부모의 의견과 무관하게 무조건 반영하게 되어 있는 복장규정처럼 학생 50% 이상의 의견이 무조건 반영되는 교육제도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현재의 교육제도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지, 나는 그 결과도 농담처럼 궁금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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