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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와 특목고가 늘어나면서 교육 생태계 파괴는 물론이고 사회 공동체의 신뢰관계가 무너졌다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먼저, 낙담의 시기가 빨라졌다. ‘성공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라’는 과거의 나쁜 조언은 더 악랄해져, ‘이상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큰일 난다’는 협박이 부유한 지 오래다. 이는 특별한 곳에 가니 마니가 중학교 교실에서 가려진다는 말이니,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느끼는 개인들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성인들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하는 ‘실패자’라는 오명을 열다섯 살 남짓한 청소년들이 마주하면서 “대학 가기 글렀다. 내 인생은 망했다”면서 자조하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낙담의 조기화만큼 일반고는 달라졌다. 과학과나 외고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의 삶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 학교들은 동네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천재들이나 발탁되어 따로 공부하는 곳 정도로 이해되었다. 당연히 고교 입시에 집착하는 중학생들도 드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일반고는 좋은 곳에 ‘못 간’ 사람들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덩달아 명문대 진학은 자신의 그릇이 아니라는 체념이 늘면서 ‘우리 주제를 알자’는 공기가 학교에 팽배해졌다.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했던 과거의 학교가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고교 입시 실패’라는 말이 빈번해지면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자신의 생애를 불합격으로 규정하는 지금이 이상하다는 말이다. 이 지경이니 일반고 중에는 ‘우리 학교는 특목고에 아쉽게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다’면서 어떻게든 인정받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특별함을 인정받으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쪽과 반대편에서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해야만 하는 집단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사실은 자녀가 명문대에 가길 원한다면 명문고에 입학시켜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강박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 문제는 이 난리가 딱 그 학교 정원만큼의 가정에서 벌어지겠는가. ‘자사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특목고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권고는 사람 가려 전달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니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은 일상이 되고, 집착의 세월이 길고 두꺼운 만큼 개인이 체감하는 실패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관문을 잘 넘어간 이들이 좋은 리더가 되면 다행이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분류된, 그러니까 삶의 궤적이 유사한 엘리트끼리 모인 집단의 ‘합의된 결정’은 위험천만하다. 공동체 안에 다양한 계층이 존재함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께 들었던 대로만 세상 이치를 이해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이가 ‘결정권자’라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은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자리에 이르렀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정치인, 법조인, 교육자, 언론인이 되어 여론을 생산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게다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자들은 사람을 철저히 가려내는 이 틀을 유지하려고 한다. ‘어떤’ 고등학교라는 무기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다. 학교 야구잠바를 입으면서 특정한 무리들은 출신 고등학교 이름을 옆면에 새긴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구조를 고치려고 하자 여기저기서 반대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소모적인 논쟁이 지난한 가운데 자사고 학생들이 문화제를 열어 직접 공연을 한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자신들이 입시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지라고 일부 언론에서는 해석하기 바쁘다. 그렇다면 더 의문이다. 왜 그 좋은 과정을 모든 학생이 배우지 못한다 말인가? 다양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청소년의 권리인데, 이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맞춤형 학원을 다녔기에 중학교 교과 성적이 우수할 수밖에 없는 일부만이 향유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말로 철폐 사유 아닌가.

오찬호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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