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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언론에 ‘협치(協治)’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마치 ‘협치’의 전성시대가 오고 있는 것만 같다. 아마도 지난겨울의 촛불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의 정치적 협력도 협치, 노사 민관의 정책 협력도 협치라고 불려 혼동이 많다. 협치는 ‘거버넌스’를 일본식으로 번역한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는데, 아무튼 협치란 ‘정책결정과 시행에 정부만이 아니라 시민, 사회단체 등을 폭넓게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들어 민관 협치가 특히 강조되는 것은 정부나 지자체의 관료가 모든 것을 파악해 정책을 결정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동의 없이는 어떤 정책도 효과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협치가 강조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협치를 내건 사례들을 보면 2%가 아니라 10%쯤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축적된 경험이 일천하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어설픈 시도들이 협치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낳을까 걱정된다.

협치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을 협치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이다. 모든 사안에 시민을 참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모든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선적인 협치의 대상은 고도의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정책, 시민의 비판과 감시가 필요한 업무, 생활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사안, 강력한 실행체계를 만들기 위해 시민의 주인의식과 사명감이 요구되는 정책 등이다. 단지 아이디어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나 여론에 어필하려는 의도로 시행하는 협치는 낭비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협치의 틀 안에서 시민이 갖는 지위다. 아른슈타인의 ‘시민 참여의 사다리’에 따르면 참여에는 여덟 단계가 있다. 시민이 ‘동원되고, 지도받는’ 1~2단계는 사실 협치가 아니다. 3~5단계에서 시민은 ‘정보를 제공받고’, ‘의견을 내며’, ‘회유된다’. 6단계에서는 ‘정부와 대등한 파트너’, 7단계에서는 ‘부분적 권한 위임의 대상’, 8단계에서는 ‘완전한 권한을 가진 책임자’가 된다. 최근의 협치 실험들은 대개 3~4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참여의 수준을 잘 설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정부와 대등한 파트너(6단계)’라고 말하고 실제로는 ‘의견만 받은 뒤(4단계)’ 결정은 정부가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시민은 분노한다. 진정한 협치는 ‘권력의 재분배’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충분한 시간이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듯이 짧은 시간에 단발성으로 협치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갈등요소가 내재한 사안의 경우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는 발산의 단계, 서로 갈등요소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고뇌의 단계, 그럼에도 의견을 조정해나가는 수렴의 단계를 거치려면 사람들의 생각이 성숙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견이 있을 때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가도 문제가 된다. 근본적으로 협치가 지향하는 것은 ‘소수의견이 살아남아 있는 만장일치’다. 참여집단들의 상호이해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다수결로 의사결정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환이 남는다. 과연 만장일치는 가능한가? 가능하다. 정교하게 설계된 대화를 충분히 한다면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의 세계관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은 많다. 시민의 적극 참여를 조성하는 메커니즘, 참가자 상호작용방식의 설계, 명확한 목표의 제시, 목표에 어울리는 참여의 경험을 창출하는 기술, 결과물 종합과 후속조치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협치는 하나의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협치는 좋다. 그러나 최근의 협치 사례들을 보면 의지는 있으나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반복적인 실패는 회의를 조장할 것이고 결국 하나의 일시적 유행으로 끝날까 두려운 것이다. 협치는 학문적으로 행정학과 정치학의 영역이지만 협치를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디테일은 퍼실리테이션의 영역이다. 양측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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