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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어디서든 4차 산업혁명이 화두다. 알파고 앞에서 흘린 커제의 눈물이나 사람 없이 다니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마음은 참으로 당황스럽다. 무한하게 진화하는 휴대폰의 기능조차 따라잡아 내 것으로 만들기도 벅찬데 은행업무나 국제논문투고 같은, 컴퓨터로 해야 하는 일들은 편리한 듯하면서도 버겁다. 그나마 컴퓨터가 작동을 멈추어 속수무책이었을 때의 절망감은 차라리 슬픔이다.

이렇게 진화(?)하는 세상은 2030년이 되면 지금 있는 직업군의 80%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창조적인 일, 감성적인 일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일부러 움직이기 전에는 쓸 일이 줄어드는 무기력한 몸과 전화번호나 길을 기억하는 대신 내가 가진 논리체계로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피곤한 뇌는 어떻게 해야 생기로 반짝이는 건강한 상태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나뿐만은 아닐 듯싶다.

산기슭이나 계곡에서 자라며 5~6월 가지 끝에 향기로운 꽃을 풍성하게 피워내는 쥐똥나무. 가을에 검은색으로 익는 열매가 쥐똥같이 생겼다 하여 쥐똥나무란 이름으로 불린다. 국립수목원 양형호

‘산림복지’ 관련 심포지엄에 갔다가 이시형 박사님의 기조강연을 들었다. 열심히 다른 나라들을 따라 잡으며 살아왔던 우리나라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림복지진흥에 관한 법률’을 만들며 앞서가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틈나는 대로 도심을 떠나 자연으로 가서, 닫혔던 오감(五感)을 숲에서 열어 쾌적한 자극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어려움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치료라고 말씀해 주셨다.

식물을 공부하며 숲에서 자연을 만났던 순간들의 행복감을 공유하고 싶어 나도 자주 오감을 열어 식물을 만나는 이야기를 하지만, 의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자연은 엄청난 힐링파워”라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하던지.

그 무렵 난 인상적인 책 한 권을 읽었다. 살충제의 피해로 봄이 되어도 깨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이야기인 <침묵의 봄>이란 책으로 전 세계에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준 레이첼 카슨이 쓴 <더 센스 오브 원더(The Sense of Wonder)>였다. 이 책은 “당신의 자녀가 자연에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우라”라는 메시지가 담긴 글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엮어낸 단행본이다.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는 바로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킨 신선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세상을, 그리고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눈을 미쳐 어른이 되기도 전에 상실하지 않으려면 순수한 본능이 흐려진 어른들의 방식으로 ‘알게 하기’보다 ‘느끼게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최근에 참으로 창의적인 일을 보게 되었다. EBS 손승우 PD의 <녹색동물>이란 자연다큐멘터리가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동물보다 역동적인(?) 녹색식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게 이 작업이 놀라웠던 것은 기존에 학자들이 글자로 알고 있는 지식을 영상으로 담은 그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래서 창의적일 수밖에 없는 새롭고 놀라운 미지의 자연 속 모습들을 관찰과 노력으로 찾아내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나무두더지의 변기로 사는 네펜데스’ 편은 알려진 지식을 표현하는 방식이 신선하고 새로웠다면, 우리 식물 국화쥐손이 씨앗이 창처럼 땅에 꽂혀 자리를 잡는 모습은 그의 관찰로 처음 세상에 알린 기록인 것이다.

자연다큐를 잘 만들기에 매우 열악한 우리나라 환경에서 적어도 내게는 우리나라 자연다큐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느껴지는 이런 작품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궁금했는데 서문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네 살짜리 딸아이와 산책을 하다 뒤처져 걷는 아이를 뒤돌아보며, 아이는 단순히 느리게 걷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궁금하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덕분에 아이의 시간대로 돌아가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걷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의 오감을 존중하여 따라가니 어른들의 감각이 일깨워진 순간이다.

숲에서 오감을 깨워 느끼게 되는 자연에 대한 경이감이 삶에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이 난감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창의적이고 감동적인 일을 해내는 인간이 되고, 피로로 지친 몸과 뇌를 건강하게 하는 일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세 사람이 해준 것이다.

나도 감히 그들과 같은 생각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동참하시라고 말하고 싶다. 숲으로 가자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문 밖이라도 나가 동네 공원 한 바퀴라도 돌아보자고. 그도 어렵다면 창문이라도 우선 열어보자고. 오감을 열고 여름을 앞에 둔 풀과 나무들을 바라보자고. 일생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나무들의 반짝이는 초록 잎새들의 생기를 보고, 그 잎새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소리에 묻어오는 초록향기를 느껴보라고. 그 옆에 피어 있을 쥐똥나무의 순결한 흰색 꽃과 그 향기가 얼마나 어울리는지 체험해보라고. 고개를 숙여 만난 괭이밥의 잎새의 새큼함은 얼마나 침을 고이게 하는지 감지해 보라고. 그런 자연의 경이로움이 여러분 삶에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해본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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