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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0년 8월7일 김대중 정부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했다. 당시 언론과 진보진영은 “3김 시대를 청산하고 새 정치 한다면서 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았나”라며 탐탁지 않아 했다. 취임 초 노무현 장관은 청사 근처 식당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만나 고심을 털어놨다. “주변에서 왜 장관 맡았냐는 말이 하도 많아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한 참석자가 별거 아니라는 듯 “뭐 그런 걱정을 합니까. 아니 노무현이 DJ의 차세대로 성장하는 자체가 청산인데. ‘청산하는 중입니다’라고 하면 되지요”라고 했다. 그는 “아, 맞네”라며 무릎을 쳤다. 그제야 밝은 표정으로 소주잔을 들더니 건배사를 외쳤다. “청산하는 중입니다.”

6·13 지방선거가 끝났다. 탄핵 연장, 정상회담 선거였다. 결과는 보수 궤멸, 지역주의 붕괴로 요약된다. 정당 체제 변화, 세대 요인 부각을 전망한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분석이 난무한다. 그러나 선거로 시작해 선거로 끝나는 한국 정치는 낡은 얼굴로 다가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번 지방선거만 해도 중대선거(기존 정치패턴을 깨뜨린 선거) 계기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분명 더 깊은 심연이 있을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난달 23일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대통령 추모의 집을 찾은 시민이 손자와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정희신화’와 ‘노무현신화’였다. 신화는 집단무의식에 터 박은 언어적 상징체계, 공동체를 뭉치게 하는 정치적 상징체계로 구분된다. 박정희신화와 노무현신화는 후자, 한국 정치사를 지배하는 상징체계다. 정치에서 신화는 일종의 신념 프레임이다. 박정희신화가 이익, 성장, 권위주의 연합이라면 노무현신화는 명분, 분배, 민주주의 연대를 상징한다. 노무현신화가 박정희신화를 물리친 것이 지방선거 결과였다. 2016년 겨울 촛불집회는 서막이었다. 그땐 박정희신화의 투사였던 박근혜를 노무현신화가 끌어내렸다. 이번엔 두 신화가 정면 대결했다. 노무현신화가 박정희신화를 밀어냈다. 더 강력했다.

박순찬 화백. 경향신문 자료사진

PK(부산·울산·경남)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전 지역을 석권했다. 4년 전만 해도 한 곳에 불과했던 기초단체장을 25곳이나 차지했다. 1990년 3당 합당 후 28년 동안 한 길로 흘렀던 보수의 본류는 방향을 바꿨다. 오거돈, 송철호, 김경수 당선인 등 PK 광역단체장들은 노무현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젊은층은 민주당을 ‘우리 당’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TK(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대구에서 27년 만에, 경북에서 23년 만에 광역의원을 배출했다. 자유한국당 대구지역 기초단체장 당선인들의 평균 득표율(48%)은 4년 전(67%)에 견주면 약 20%포인트 추락했다. 특히 박정희신화의 직접적 자장 안에 있는 구미는 “우리를 더 이상 박정희 자식으로 취급 말라”고 경고하며 시장 자리를 민주당에 안겼다. 시민들은 ‘TK가 스윙지역’이라고 뿌듯해한다. 다만 PK와 달리 신화는 심판했지만 아직 이익연합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화의 자장이 강하지 않을 땐 이익이 앞서게 마련이다. 한국당이 광역단체장 2곳, 기초단체장 31곳 중 25곳을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북지역의 구미와 다른 지역 승부 차이에도 이 공식이 들어맞는다.

2017년 5월23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한 후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주의, 색깔론에 의지하는 분열의 정치는 끝났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고, 3당 합당 후 30여년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며 노력한 결과”라고 했다.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두 신화의 오랜 싸움이 끝났다는 말로 이해한다.

보수세력이 기댈 신화는 더 이상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노무현신화는 어떤 운명일까. 적어도 이번 선거만 보면 시민들은 노무현신화를 접은 것 같지는 않다. PK와 TK 선거 결과는 노무현신화가 꿈꿨던 명분(다양성의 정치), 분배(경제성장주의 배격), 민주주의(권위주의 통치 종말)의 힘이라 볼 수도 있을 테니.

신화가 저물어야 역사가 시작된다. 역사로 가는 과정에서 박정희신화는 소멸됐지만 노무현신화는 경로에 가깝다. 지역주의의 속까지 모두 도려낸 건 아니라는 의미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청산을 이렇게 강조했다. “2개 이상의 정당이 같은 지역에서 경쟁해야 부패와 전횡을 막을 수 있다”, “광주에서 콩(진실)이면 부산에서도 콩(진실)이다”. 파란(민주당) 물결이 PK를 뒤덮었다고, TK에 스며들었다고 지역주의가 전부 소멸되지 않았다는 역설이다.

지역주의뿐인가. 선거 결과를 두고 중대선거 가능성까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중대선거의 필요충분 조건인 이념적·사회적 재편, 정당 일체감 강화가 이뤄졌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지금 한국당의 혁신 논쟁만 봐도 드러난다.

다시 18년 전 건배사를 생각한다. ‘청산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막 ‘박정희신화’를 끝내는 마지막 제사를 올렸다. ‘노무현신화’는 역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시민들은 노무현의 신화가 문재인의 역사로 이어지는 길을 매섭게 지켜보고 있다. 다음 선거 뒤 칼럼은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쓸 수 있을까.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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