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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는 승리보다 패배가 선명하게 기록된 선거로 남을 것이다. 80%에 근접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 등을 감안하면 더불어민주당의 낙승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졌느냐’의 문제는 짚어야 한다. 정치의 영역이든, 스포츠의 세계든 ‘잘 진다’ ‘멋있게 진다’는 말이 있다. 지더라도 명분을 지킨다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나 대안보수를 자처한 바른미래당은 그러지 못했다. ‘한국당과 손잡느니 정계은퇴하겠다’던 바른미래당 안철수 전 서울시장 후보가 궤변에 가까운 논리로 한국당 김문수 전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했던 것이나, 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가 막말로 자기 당에서도 외면받은 일은 야권 패배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훗날 이번 선거는 둘의 추락으로 더 기억될지 모른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13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방송3사의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홍준표 전 대표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몰랐다. 빈털터리 집안의 가장이면서도 ‘거부’라도 되는 양 큰소리를 쳤다. 불리한 여론조사를 두고는 “지지율 조작” “선거가 끝나면 여론조사 기관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현실부정은 과대망상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한국당은 갈수록 고립되는데, 민심이 돌아오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곳간이 비었는데도, 하늘에서 돈이 떨어질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가장이 몽상에 빠지면서 어려운 집구석은 더 흉흉해졌다. 정권과 “싸우는 법을 안다”고 하더니, 식구들과 다퉜다. 배고프다고 하소연하는 식구들에게 “바퀴벌레” “암덩어리” “연탄가스” 등 막말을 퍼부었다. 힘들다는 푸념은 그에게 가장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막말은 영남 지역에서 친밀감의 표시” “서민적 용어를 알기 쉬운 비유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어이없는 해명을 한 것도, 나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은 ‘존중받는 가장’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됐을 터다.

대단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원했던 홍 전 대표의 바람은 선거 후에야 현실이 됐다. “그분은 보수당을 궤멸시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 같다”는 정두언 전 의원의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한국당은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해체”까지 언급하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홍 전 대표 덕분에 자유당 시절부터 한국 사회 주류로 행세해온 한국당은 완전히 망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못지않은 역사적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안철수 전 후보는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가장이었다. 지방선거 후 보수재편의 중심에 서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가족들의 희생과 양보를 강요했다. 정치의 기본인 명분과 절차적 정당성도 깡그리 무시하고 독단과 변칙을 반복했다. 자기만 알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합당에 반대하자, 당헌·당규까지 바꿔 밀어붙였다. ‘바른미래당은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자아도취가 아니고서야 이런 무리수를 둘 수는 없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재·보궐선거에 나선 일부 후보들의 사퇴를 종용한 것도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경쟁력 있는 인사를 세워야 한다’며 경선을 거친 후보들을 그만두게 하려 했다. 서울시장 선거전에 한 표라도 도움이 될 인사들을 내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안 전 후보의 측근으로 알려졌던 바른미래당 광역단체장 후보의 말이다. “지도자는 자기는 죽고 남을 살려야 한다.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해 남에게 죽으라고 한다.”

선거 막판 안 전 후보의 바닥은 온전히 드러났다. 한국당과 손잡으면 정계를 은퇴한다더니, 한국당 김문수 전 후보에게 사퇴를 촉구했다. 그래놓고 “경쟁력 있는 후보에게 몰아줘야 한다”며 인위적 단일화 시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전 후보를 전화로 불러내어 다짜고짜 양보를 요구해놓고, 단일화 시도가 아니라고 궤변을 던진 것이다. 설사 단일화가 됐어도 선거에 이길 수도 없었겠지만, 만에 하나 단일화 덕에 당선됐다면 또 어떻게 했을 것인가. 김 전 후보를 지지했던 수많은 태극기 부대들의 이익을 대변해 ‘박근혜 석방’을 외칠 것인가.

홍 전 대표는 사퇴했고, 안 전 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둘 다 정계은퇴를 말하지는 않았다. 홍 전 대표는 물러나면서도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나라’를 정치세력 사이에서 서로 넘길 수 있는 물건인 양 취급하는 얼토당토않은 인식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넘어간 것이 아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선택했다. 주인인 국민들이 홍 전 대표와 한국당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은 안 전 후보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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