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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 동해안에 가려는 사람들은 대개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한여름에는 밤 11시에 출발하는 강릉행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청량리역이 북새통이었다. 이들을 태운 기차는 밤새 여러 도시를 가로지르고,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강을 따라 달리다가 꾸역꾸역 높은 산을 넘었다.

통로까지 빈틈없이 자리를 메운 사람들은 부대끼며 너부러지고, 주저앉아서 밤새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그들이 제 흥에 지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로 기대어 잠에 곯아떨어졌을 무렵 기차는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바다로 달렸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희끄무레하게 동이 트는 걸 지켜보다가 잿빛 하늘과 같은 빛의 바다가 보여서 탄성을 지르면 기차 안은 다시 술렁거렸다. 그렇게 기차 안에서 함께 아침을 맞은 사람들은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 기차에서 내릴 때면 눈인사라도 하면서 헤어졌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90분이면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생긴 마당에 강릉행 밤기차는 정말 까마득한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동해 푸른 바다를 보리라 마음먹으면 차에 올라 세계에서 11번째로 긴 터널을 통과하고, 하늘 높이 치솟은 고가도로를 횡단하여 동해안까지 전력 질주할 것이다.

불편하고 번거로우며 몸이 수고로운 과거를 좋다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여행을 떠난답시고 집을 나와서는 어서 달려보라고 잘 닦아놓은 길에 올라 정해놓은 목적지만을 향해 일사천리로 달리다 보니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달리고 있는가? 잿빛 도로와 굉음에 노란 불빛이 한데 얽혀 있는 긴 터널과 높이 가로막은 방음벽과 속도제한 표지판만을 보면서 왜 달리는가?

차가 막히지만 않는다면 정말 빠른, 동해안으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오도카니 서 있던 막국수 집도, 지름길일 거라 싶어 들어섰다가 마주친 시골 동네의 구멍가게도, 밭에서 막 따와서 양은솥에 푹푹 삶아낸 옥수수도, 그리고 사람이 없다. 그저 그곳에는 같은 곳을 향해 경쟁하듯 달려 나가는 조바심 난 차들만 있을 뿐이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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