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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2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2년 전에 똑같이 생긴 아파트만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곳으로 이사 왔을 때, 먼저 터를 잡고 살던 이들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다. 호수공원도 있고, 학원도 가깝다면서 애들 키우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호수공원은 밥 먹고 산책이나 갈까 하고 나서기에는 너무 멀었고, 동네 엄마들은 가까운 학원은 안 좋다면서 대형 버스가 학원생들을 실어 나르는 멀리 떨어진 학원으로 아이들을 보냈다.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의 장점을 활용할 수는 없었으나, 아이는 그런대로 잘 적응했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만 삭막하게 서 있는 동네가 서먹했다. 사람들은 소리 없이 건물을 드나들었고, 아파트 단지에는 아파트만 버티고 있는 듯 조용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조용하지 않은 사람은 경비 아저씨 한 사람뿐이었다. 경비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데, 들고나는 이들을 늘 웃는 얼굴로 챙기면서 거리낌 없이 안부를 물었다. 택배를 찾으러 가서 그와 한두 마디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게 즐거웠다. 아파트 주민들은 모두 그와 친했다.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는 일요일이면 그는 분리수거가 서툰 이들을 도왔고, 주민들은 그에게 직접 탄 커피를 갖다 줬다.

밖에 나갔다가 경비실 문을 활짝 열고 앉아 있는 그를 보면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그 덕분에 우리 동네에 천천히 적응해 나갔고, 이 동네도 사람 사는 곳이라 느꼈는지 모른다. 그가 훌쩍 떠나고 다른 이가 경비실에 앉아 있을 때는 무척 섭섭했다. 그가 떠난 뒤 여러 차례 사람이 바뀌었다.

얼마 전 택배로 온 사과 상자를 찾으러 경비실에 갔다가, 아저씨한테 몇 개 드릴 요량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상자 테이프를 벗겨냈다. 그러자 아저씨가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아니 뭘 확인하려고요? 그거 온 대로 그냥 둔 거예요.”

그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몸이 움츠러들어 대꾸도 못 하고 사과 세 개를 책상 위에 어색하게 올려놓았다. 나는 사과 박스를 들고 오면서 중얼거렸다. 그게 아닌데….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한 걸 자책하면서 시시껄렁한 안부를 주고받던 그를 생각했다. 할아버님, 강건하신지요?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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