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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끄트머리에서 보내온 짤막한 메일을 받고 그날이 떠올랐다. 2015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푸근했다. 그래도 천장이 높은 학교 강당은 썰렁해서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 학년이 모두 나왔다고 하니 200여명이 넘었다. 그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하나같이 지쳐 있었다. 지루하고 시시할 게 뻔한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학생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강연이고 뭐고 슬그머니 도망가고 싶었다.

그때 나타난 학생이었다. 사회를 맡았다고 인사하면서 밝게 웃던 모습. 책을 낭독하면서 어색한 연기를 태연하게 잘 해내던 모습. 메일을 보낸 학생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곧 안부 인사는 잊혔다.

그런데 그 학생은 까맣게 잊히지 않을 만큼 메일을 보냈다. 어느 날은 심야자습반에 들어가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름대로 학교생활을 즐겼는데, 대입이라는 벽 앞에 서니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막막하다는 말끝에 내 안부를 물었다. 나는 이리 답장을 보내고 싶었다. 나도 그러하다, 빈 종이에 첫 줄을 시작해야 하는 막막함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힘내라는 의례적인 답장을 했고, 벽 앞에 선 소년은 또 한참 만에 대수롭지 않은 일상을 적은 메일을 보냈다.

지난가을에는 첫사랑의 아픔을 길게 적어 보냈다. 메일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그의 절망과 슬픔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너희 모두 다른 빛깔을 갖고 있는 별이다”라는 말이 비로소 가슴에 와 닿았다. 강연 때마다 나는 그 말을 입으로만 떠들어댔던 것이다. 성적에 짓눌린 채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로 학원으로 쓸려 다니는, 요즘 것들이라고 싸잡아 말하며 한 명 한 명의 목소리와 웃음과 아픔은 보려고도 하지 않았구나. 나도 그런 어른이었구나.

지난가을 내내 머나먼 남쪽에서 홀로 분투하고 있을 소년이 생각났다. 수능을 치르면 찾아올 테니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한 소년은 아직 소식이 없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을 그를 잠자코 기다린다. 혼자 서울까지 올 수 있으려나, 꼰대 같은 걱정을 하면서….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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