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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 영웅은 짱가, 마징가, 태권V 따위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태권V의 실체는 구체적이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눈에서 뿜어져 나온 레이저빔이 63빌딩에 반사되어 국회의사당을 비추면 둥근 돔이 열리면서 그가 등장할 거라고 했다. 꽤 오랫동안 63빌딩을 보며 발차기로 지구를 구할 거대한 존재를 떠올렸다.

허무맹랑하지만, 가슴 뿌듯한 이 판타지가 깨진 것은 우리 동네에 59층 아파트가 들어선 뒤였다. 배추가 새파랗게 자라고, 호박 넝쿨이 뻗치던 곳에 어느 날 우뚝 솟은 아파트의 위용에 익숙해지면서부터 63빌딩을 봐도 경이롭지 않았다. 그리고 정의를 수호할 존재에 대해서도 잊었다. 따지고 보면 고층 아파트 탓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더는 꿈꾸지 않게 되면서 판타지 세상은 멀어졌다.

하지만 꿈꾸지 않는 것도 나이 탓은 아니다. 59층 아파트 입구에서 붕어빵 포장마차를 하는 할아버지는 여전히 새로운 꿈을 품고 있었다. 교직에 있었다는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과 영어를 가르칠 공부방을 열 생각이라고 했다.

단팥을 꼬리까지 꽉 차게 넣어주며 손님한테는 반드시 식지 않은 뜨거운 붕어빵만 판다는 그는 의기소침해 있는 청년들을 걱정했다. 나 같은 노인도 이렇게 하는데, 청년들은 못할 게 없다는 뻔한 말도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장 뜨거운 순간을 세상에 내놓아도 외면당하는 청년들의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매번 다른 빛깔의 붕어빵이 나오는데, 더 구워지거나 덜 구워지는 것이 부지기수지요.” 그는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달궈져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는 것. 인생은 붕어빵 틀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모루와 같다는 것.

우리 동네에는 태권V를 끌어낼 레이저빔 따위를 반사할 리 없는 고층 아파트가 있고, 그 아파트 아래에는 날마다 자신의 꿈을 달궈내는 붕어빵 포장마차가 있다. 그 포장마차 주인은 문제를 맞히면 한 개를 덤으로 준다. ‘붕어빵을 먹는 까닭은 ㄴㅁ이니까, ㅊㅇ이니까, ㄱㅇ이니까.’ 초성만 보고 낱말을 맞히면 된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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