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낯선 도시는 황량했다. 뫼비우스 띠처럼 길게 이어진 건물이 불쑥 솟은 도시는 건물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에워싼 길을 돌고 또 돌아도,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든 이들을 구속하라고 소리쳐도, 건물은 뭣 하나 토해내지 않았다. 드나드는 이 없이 해가 지고 건물에는 불이 켜졌다.

마침 그날은 보름 전날이었다. 살짝 이지러진 달은 휘영청 밝았고, 맨땅을 무대로 삼은 이들의 노래는 아름다웠다. 노래를 들으며 울적했다. 멋대로 예술가를 솎아낸 이들의 뻔뻔함을 보면서 한 일도 없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들어간 나의 부끄러움과 마주해야 했다. 나 또한 이지러진 세상의 일부가 아닌가, 나는 대체 뭘 했는가 자괴감이 들 무렵 그가 나섰다.

맨발로 차가운 땅을 딛고 선 그는 음악이 나오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어깨를 젖히고, 팔을 휘젓고, 등을 굽히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격렬한 그의 몸짓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몸짓은 소리 없는 언어이고, 외침이었다. 누구인가? 얼핏 본 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의 춤이 끝나갈 무렵 광화문 문화예술인 캠핑촌에서 여러 번 마주친 남자 하나를 떠올렸다. 그를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의 얼굴이 무대에 오른 순간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춤사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무대에서 나온 그는 수굿하게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따뜻하게 웃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존재가 예술일 수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있던 많은 이들이 그랬다.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에서 늘 뭔가를 만들어 내는 판화가도, 부당한 세상에 맞서느라 시를 쓸 시간조차 없을 시인도, 겨우내 광장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춤꾼도. 그들은 존재 자체가 예술이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든 이들은 설마 그걸 알았던 것일까? 그 예술의 가치를, 그 예술의 힘을! 그걸 안다면 무엇으로도 그들의 발목을 묶어 놓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까?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세종시에 다녀오면서 생각했다. 블랙리스트 따위는 절대로 만들지 않는 세상을 못 만든다면, 제대로 맞서 보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라도 하자고. 뻔뻔한 세상에 부끄러움 없이 맞서 보자고.

김해원 | 동화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