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의 고향이 속초라고 했다. 강연이 있어 속초로 가는 길에 퍼뜩 반도체 회사에 다니다가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그가 생각났다. 10년 전 봄날, 택시 운전사인 그의 아버지는 병세가 나빠진 딸을 택시에 태우고 서울 병원으로 달렸다고 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아버지는 차를 멈췄다. 가쁜 숨을 내쉬던 스물세 살의 딸은 택시 뒷좌석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의 꿈은 마음껏 여행을 다니는 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 일찌감치 취업이 되어서 졸업여행도 못 간 그는 결국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했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말해 왔다. 아파도 참고 꿈꿔라. 꿈을 이룰 수 있는가 물으면 답은 간단하다. 노력하라. 노력해도 안 되면 더 노력하라. 그리 말한 세상은 노력한 아이들을 함부로 쓰고 내팽개친다. 그가 산재를 인정받는 데 7년이 걸렸다.

속초 청소년수련관에서 1박2일 독서 캠프를 하려고 모인 아이들은 해맑았다. 아마도 뜀박질을 하다 발가락을 다친 모양인 한 아이는 약을 발라주는 선생님한테 은근하게 말했다.

“피가 자꾸 나는데, 아무래도 숙소에서 쉬어야 하겠지요?”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온종일 재미없는 책에 치였을 아이들은 그래도 제법 진지하게 낯선 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딴청을 피워도 난감하지만, 눈을 반짝이면서 다소곳이 앉아있으면 슬쩍 겁이 난다. 밤이라서 그랬을까. 아이들은 자꾸 어려운 질문을 쏟아놓았다. 어떤 철학과 신념으로 글을 쓰느냐, 당신이 글에 쓴 것처럼 정말 인생을 표류라고 보느냐, 대기업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을 어떻게 보느냐.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은 금수저가 될 수 없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결국 나는 그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우리는 수저가 아니다. 인간이다. 그러니 꿈꿔라.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무책임한 어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선 안 되는 거였다. 아이들의 꿈을, 아이들의 노력을 배신한 이 사회를 만든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김해원 | 동화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