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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자란 마을에는 커다란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 부부는 마을에서 가장 일찍 깨어나서 하얀 국수를 뽑아 뒷마당에 내걸었다. 바람이 불면 국수가닥이 흰 무명천처럼 너붓대는 그 뒷마당을 지나칠 때면 간간하고 구수한 냄새가 몰큰몰큰 났다.

명절이면 방앗간 앞은 불려놓은 쌀을 소쿠리에 받쳐 머리에 이고 나온 아주머니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추석 때는 흰 쌀이 곱게 빻아져 쌀가루가 되었고, 설날에는 가래떡이 되었다. 가래떡을 뽑으려면 꽤 오래 걸렸다.

설이 다가오면 방앗간은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방앗간 부부 둘이서는 밀려드는 쌀을 감당하지 못해 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이 죄다 불려 나왔다. 그러고도 일손이 모자라 먼 친척의 아들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마을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우리 할머니의 말이었다. 몸집이 작은 먼 친척의 아들은 설이 지나고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앗간 일을 도왔다. 자신의 키만큼 기다란 국수가닥을 뒷마당에 너는 것도, 쌀가루를 빻는 것도, 배달을 가는 것도 다 그의 몫이었다. 햇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더 바빠져서 가래떡도, 절편도 혼자서 척척 뽑아냈다.

할머니는 일 잘하는 방앗간 총각을 늘 칭찬하면서, 방앗간 주인을 흉봤다. 일 가르쳐준다고 데려와서 월급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다고 했다. 어느 겨울 그가 방앗간 주인하고 크게 싸우고는 짐을 싸서 돌아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지만, 얼마 뒤 그는 방앗간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방앗간을 지키고 있었고, 여전히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방앗간을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는 세상 영 못된 게 품삯 제대로 안 주고 일 부리는 거라면서 도회지에서는 그러지 못할 거라고 했다. 배운 사람들은 안 그럴 거라고.

버스 뒷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인턴이라서 한 달 죽게 일하고 60만원을 받는다며 전화로 신세한탄을 했다. 아가씨의 말을 들으면서 일 잘하던 방앗간 총각이 생각났다. 그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을 텐데, 세상은 여전히 영 못되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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